야구는 인생과 같다

by anego emi

‘아버지와 친해지고 싶어서요.’


이 나이에 이런 말을 내뱉기가 오글거렸지만… 어느 야구 열성 팬이 자신의 페이스북에‘야구 보게 된 이유’를 댓글로 달면, 여분으로 생긴 3루석 표를 주겠다는 깜짝 제안에, 내가 쓴 댓글이다. 그는 내게‘좋아요’와 함께 기꺼이 표를 주었다. 물론 내가 야구를 보게 된 진짜 이유이기도 하다.


도쿄에서 돌아온 후, 엄마의 간곡한 부탁으로 한 달간 집에 머문 적이 있다. 그리고 나는 처음으로 아버지와 단둘이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우리는 어색한 부녀지간이라 여지없이 침묵이 흘렀고, 해가 지면 거실에서 묵묵히 야구를 봤다. 일방적으로 채널 선택권은 아버지에게 있었기에 나는 그 옆을 멀뚱멀뚱 지키는 꼴이었다. 지루하기만 한 저 공놀이에 내가 재미를 붙이게 된 건 잠시라도 이 어색한 침묵을 깨기 위해서 이것저것 아버지에게 질문을 던지면서였다. 처음에는 단순한 룰에 관해 물었고, 그다음엔 선수 기용에 관한 나름의 심각한 의견이 오갔고, 나중에는 박수를 치며 감독의 지략에 환호를 지르기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시즌이 끝나자 ‘야구는 인생과 같다’는 철학적인 결론을 이끌어내며, 아버지와 처음으로 이견이 없는 공감대를 형성하게 됐다.


그리고 나는 야구를 보면서 또 한 번 확인하게 되었다. ‘기회는 누구에게나 공평하다’는 사실과 소위 ‘잘 나간다’는 말의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과 허무에 관해서.


어떤 선수가 있었다. 가끔씩 주전 선수가 갑자기 부상을 당하면 그 자리를 대신하는 역할이었다. 그 선수가 등장할 때마다 해설자는 말했다. “참, 안타까워요. 저 선수가 저럴 선수가 아닌데… 고등학생 시절, 정말로 실력이 대단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참 안 풀립니다. 언젠가 실력 발휘를 하겠죠?” 이 선수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만큼, 그의 말에는 진심이 느껴졌다. 그의 말대로 정말 그 선수는 안 풀렸다. 기회가 왔지만 진루타를 쳐내지 못했고, 어쩌다 베이스를 밟아도 어설픈 도루나 어이없는 주루 플레이로 아웃을 당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힘없이 돌아서는 그의 초라한 뒷모습을 향해 해설자는 말했다. “참… 아쉬운 순간입니다. 언젠가 잘하는 때가 오겠죠.”


그리고 이듬해, 바로 그때가 왔다. 이번에도 개막전에서 주전으로 선발되지 못한 그 선수는, 거액 연봉을 주고 스카우트한 ‘잘 나가는’ 선수의 갑작스러운 부상으로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놀랍게도 연신 방망이를 휘둘러대며 줄줄이 득점을 올리고, 펄펄 나는 수비를 펼치는 것도 모자라, 모두를 기립하게 했던 역전의 주인공이 되었다. 환하게 웃는 그의 얼굴이 처음으로 화면에 클로즈업되는 순간, 해설자가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야, 그 실력이 빛을 발하는군요. 그럼요. 그런 선수이니까요.” 그리고 덕 아웃을 지키는 부상당한 그 비운의 ‘잘 나가는’ 선수가 잠시 화면에 스쳐 지나갔다. ‘잘 나가는’ 그는 한순간에 자의와 상관없이 자신의 자리를 내주고, 벤치 신세가 되었다. 늘 벤치를 지키던 ‘잘 안 풀리던’ 그는 틈을 파고들며 실력을 빛냈다. 어떤 방법으로든 기회는 공평하게 주어졌고, 그 선수는 보란 듯이 자신의 기회를 살렸다.


기회란 준비되지 않은 자에게는 위기와 같다. 프로의 세계에 뛰어든 이상,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꾸준히 실력을 쌓는 것은 기본이지만, 자꾸 엇나가는 타이밍을 보며 행운의 여신이 자신만 외면하고 있다는 억울한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기회를 제대로 얻지 못하는 노력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는 생각에, 불끈 쥐었던 두 주먹에 힘이 빠진다. 그러나, 그 순간 나에게 기회를 주는 것은 나라는 사실을 떠올려야 한다. 파티에 가기 위해서는 파티복부터 준비해야 하듯, 나에게 더 근사한 파티복을 사주지 않는다면,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친 기회와 성공적으로 조우하기는 영영 힘들다.


오늘 내가 얻은 기회는 누군가의 기회일지도 모른다. 그 기회 덕분에 내가 잘 나가게 되었다고 해도, 언제든지 다음 주자에게 바통을 내줄 준비를 하고 마음을 비워야 한다. 기회는 돌고 돌아서 결국 또다시 내게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그러니 억울해하지도 조급해하지도 말고, 기회가 내 차례가 될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린다면 좋겠다.




# tip

스포츠 경기를 보다 보면 ‘나만 이런 게 아니구나’ 하는 뜻밖의 교훈을 얻을 때가 많다. 그리고 시간을 내서 경기장에 발을 디디기 시작하면 진짜로 신세계가 펼쳐진다.


<아네오 에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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