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한 A 씨는 대학을 졸업한 지 1년이나 지났지만 좀처럼 취업이 되지 않았다. 오늘도 포트폴리오를 들고 여기저기 면접을 봤지만, 상대의 얼굴은 시큰둥했다. 뭐랄까…. ‘너보다 더 괜찮은 사람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표정과 미소였다.
좌절한 A 씨는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뻥 뚫린 창밖의 강을 보다가 무언가에 홀린 듯 급히 지하철에서 내렸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강가로 향했고, 할아버지의 민머리처럼 잔디가 띄엄띄엄 난 인적 드문 곳에 자리를 잡고 털썩 주저앉았다. 가방에서 마시다 만 미지근한 녹차 병을 꺼내 한 모금 크게 삼키고, 자동으로 숙여지는 머리를 따라 시선은 바닥으로 향했다. 쌀 한 톨만 한 구멍으로 개미들이 일렬로 줄지어 나왔다. 개미들은 땅바닥에 떨어진 개미구멍보다 더 큰 과자 부스러기를 운반하기 시작했다. 과자 부스러기를 둘러싸고 행진하듯 부지런히 움직였고 죽은 듯이 잠시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 그런 개미들의 먹이를 위한 사투를 묵묵히 보다가 눈알이 뻐근해지는 걸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하늘은 짙은 코발트색으로 물들어가고 있었고, 저 멀리에서 지나가는 페리의 불빛이 반짝였다. 언제 시간이 이렇게 흐른 것일까? 그는 오늘 저 무용한 것들의 하루를 훔쳐보느라 나의 하루를 그냥 흘려보냈다는 생각에 깊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했다. 그래, 저들처럼 서두르지 말고 한 가지만 생각하고 한 가지를 위해 살아보자. 무조건 그림을 그리자. 그리고 그림과 함께 세상 밖으로 조금씩이라도 움직여보자.
이 스토리는 내가 다니던 도쿄의 전문학교에서 일러스트를 가르치는 어느‘미술 천재’의 쓸쓸한 취업 도전기다. 그는 그 후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다양한 방법들을 접목해서 그림을 그렸고, 그의 작품성을 인정한 기업의 후원으로 대학원을 다녔다. 그 덕분에 이제는 여러 곳의 전문학교와 본인의 모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선생님은 ‘무용한 것들’을 주제로 그림을 그려오라고 과제를 내며, 서두에 자신의 경험담을 털어놓았다. 살다 보면 무용해 보이는 것들로부터 돌연 습격을 당하는 것처럼 훅 용기를 얻기도 하고, 뜻밖의 영감에 사로잡히기도 한다고. 세상에는 나에게 무용한 것들이 더 많지만, 그것들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 다양한 볼거리가 생겨 인생이 풍성해진다고. 게다가 그런 무용한 것들은 대개 공짜라고 덧붙이며 환하게 웃었다.
어느 일요일 오후, 후배와 풋귤청을 만들다가 문득 선생님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이때만 잠깐 나왔다가 사라지는 그저 시큼하기만 한 이 연두 빛의 귤로 어떻게 청을 만들 생각을 했을까? 하긴, 쓰레기봉투에 그림을 그려 예술품으로 승화시킨 뉴욕의 아티스트들도 있었다. 그러고 보면 무용해 보이는 걸 유용하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인생의 색다른 발견이자 묘미인지도 모른다. 내 주위를 둘러싼 무용한 것들에게 자신만의 아이디어를 더해보자. 모르는 일이다. 기적이 일어날지도.
# tip
시간을 충분히 내어 하나의 대상을 관찰해보자. 내가 몰랐던 다양한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하늘도, 구름도, 꽃도, 바람도 관찰해보면 다르다. 신기하게 움직이고 변화하고 특별하게 느껴진다. 이런 걸 사진을 찍거나 그리고 쓰면 나만의 작품이 되지 않을까?
<아네고 에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