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작정 떠난 산책 끝에

동네 소바

by anego emi
10.소바.jpg

20년 전 한 선배가 자신이 회사를 만들면 ‘산책’이라고 이름을 짓고 싶다고 했다. 그 이유는 산책 오듯이 가벼운 마음으로 회사에 오는 기분을 주고 싶어서라고 했다. 거창한 명분과 비전을 가진 단어의 조합들이 회사의 이름으로 각광받던 그 시절에 - 나 또한 그 회사로 당장 출근하고 싶은 마음이 들만큼 - 참으로 신선하고 낭만적인 발상이었다. 나는 출근이라는 게‘매일 회사를 가는 것이 아니라 매일 산책을 가는 것’이라면 얼마나 근사할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하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계획 없이 그냥 걷는 산책을 좋아했다. 나는 낮이건 밤이건 편안한 운동화를 신고 무작정 집을 나와 눈앞에 펼쳐지는 익숙하거나 낯선 그 길 위로 걷고 싶을 만큼 계속 걷곤 했다. 무슨 이유였던지 쉽게 정을 붙이기가 힘들었던 쓸쓸한 가을바람 같은 도쿄에 처음으로 마음을 열게 된 것도, 4년간의 유학시절 동안 가슴이 무너질 때마다 황혼이 지는 밤하늘 속에서 나를 위로해 준 것도, 바로 산책이었다. 동네마다 사시사철 꽃이 피는 아담한 공원과 사각사각 낙엽 밟는 소리가 들리는 고즈넉한 절이 있고, 키 작은 집들 덕분에 탁 트인 하늘이 보이는 좁다란 골목이 많은 도쿄는 아마도 산책을 하기에 최고의 환경이었는지도 몰랐다.


나는 사는 게 무미건조하다는 지인들에게 나처럼 무작정 걷는 산책을 해보라 권한다. 어느 곳이든 길을 따라 뚜벅뚜벅 발걸음을 옮기며 내 앞을 스쳐지나가는 모든 것들과 천천히 눈을 맞추면 깜빡 잊고 살았던 ‘사는 모습‘

과 사는 이유’가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평범하지만 다양한 사람들의 움직임과 똑같아 보이지만 각자의 개성이 넘치는 가게들을 만나게 되고, 그 속에 숨겨진 보통의 일상과 세월의 흔적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 순간, 잔잔하게 퍼지는 가슴 뭉클한 소소한 행복감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도쿄에서의 세 번째 가을이 깊어가는 일요일 오후, 과제 때문에 줄곧 밀어 두었던 여름 홑이불을 속시원히 빨아 널고 방 청소도 말끔히 하고 산책을 나왔다. 어느새 땅거미가 내려앉으며 어둑어둑 해지는 익숙한 그 길을 귓가의 음악소리에 맞춰 한참을 걸었다. 제법 차가워진 바람은 온몸에 맺힌 땀방울들을 금세 서늘하게 식혔다. 나는 옷깃을 여미며 ‘꼬치구이’라 크게 써 붙인 작은 가게로 들어갔다. 주인장이 내민 메뉴 판을 보니 굵은 붓 팬으로 갈겨쓴 일본 한자들로 가득했다. 이럴 때는 가게 안을 둘러보고 사람들이 주로 먹고 있는 메뉴를 시키는 것이 가장 좋았다. 그런데 좀 이상했다. 이곳은 이자카야인데 옆자리의 아저씨는 두툼한 새우튀김을 올린 소바를 맛있게 먹고 있었고 뒷자리의 커플도 마찬가지였다. 다시 메뉴 판을 꼼꼼히 봤지만 그 어디에도‘소바’는 없었다. 그 순간 번쩍 생각이 났다.‘아하… 우라 메뉴다.’-‘우라’는 일본 말로 뒤라는 뜻이다 – 즉 메뉴 판에는 없지만 단골들에게만 제공되는 비밀 메뉴였다.


나는 소바와 뜨거운 정종 한잔을 주문했다. 소바 위에 올려진 큼직한 새우튀김을 국물에 푹 담근 후 젓가락으로 잘라먹고 정종 한 모금을 넘겼다. 달고 짠맛이 적당히 밴 새우튀김과 뜨끈한 정종이 뒤섞이며 맛있게 녹아내렸다. 일요일 오후 무작정 떠난 산책의 끝에 만난 동네 소바 – 정종만 홀짝이지 말고 조금 더 맛있게 먹을 걸 그랬다.


<아네고 에미>


매거진의 이전글어른들의 리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