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모닝 세트
열대야에 시달리던 나는 이른 새벽부터 눈을 떴다. 후덥지근하고 끈적한 기운에 완전히 장악당한 익숙한 이 공간이... 정나미가 뚝 떨어질 만큼 순간 낯설어졌다. 나는 무거운 머리를 재차 흔들어 깨우며 냉장고 속 찬 생수를 페트병 채로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래, 더위로 숨통을 조여 오는 이방을 얼른 탈출하는 거다.'
서둘러 샤워를 하고 헐렁한 티셔츠와 면바지를 꺼내 입고 화장끼 없는 민망한 맨 얼굴은 커다란 선글라스로 반쯤 가리고 집을 나섰다. 아, 그런데 뭘 하지? 서점보다 더 시원하고 쾌적한 곳은 없을까? 그래, 영화를 보자. 지금 이 시간이면 조조 관람으로 영화 표도 할인받을 수 있고 내가 좋아하는 폭신한 계란 프라이가 올려진 에그 머핀과 감자 알갱이가 씹히는 바싹한 해시 브라운 그리고 차가운 아이스커피를 세트로 살 수 있는 맥 모닝의 시간이니까. 갑자기 신이 난 나는 영화관 1층에 있는 맥도널드에서 그날따라 원 플러스 원인 푸짐한 맥 모닝 세트를 사고 가운데 몇 줄을 띄엄띄엄 겨우 채운 한적한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솔직히 아무런 정보도 없이 즉흥적으로 골라잡은 영화인지라 영화에 대한 기대는 그다지 없었다. 단지 집보다 백만 배쯤 시원한 곳에서 편안하고 푹신푹신한 의자에 깊숙이 파묻혀 일찍 일어나는 자에게만 허락되는 맥 모닝 세트를 오랜만에 먹는 것으로 내가 오늘 영화관에 온 이유는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한 손에 꼭 쥐고 있던 에그 머핀이 차갑게 식어갈 만큼 영화 속에 흠뻑 빠져들었다. 영화를 보는 줄곧 알 수 없는 묘한 서글픔이 내 가슴을 향해 누군가가 끝없이 노크를 하는 듯 잔잔하게 울려 퍼졌다. 예고 없이 닥친 익숙한 것과의 결별. 어떤 위로에도 꿈쩍 하지 않는 상실감. 스스로 치유하기 전에 절대 사라지지 않는 깊은 상처. 아무리 지우려 해도 또렷이 남겨진 지옥 같은 그리움. 남자 주인공의 암울한 표정과 마음의 고통에서 벗어나려 애쓰는 집착에 가까운 광기 어린 행동들이 매력적인 음악을 타고 스크린 속에서 펼쳐졌다.
영화를 보면서 도쿄에서 나와 같은 학교를 다녔던 나보다 한참 어리고 새침했던 그녀가 문뜩 생각났다. 그녀의 남자 친구는 일본어 어학원 시절에 만난 중국 유학생이었다. 그렇게 몇 년을 살가운 연인으로 지냈는데 어느 날, 여름방학을 앞두고 할머니가 위독하시다면 중국으로 다급히 돌아갔고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다 되도록 그 흔한 문자 한 통이 없었다. 방학 내내 그를 기다리며 힘들어했던 그녀는 새 학기가 시작되자 다 잊은 듯 예전처럼 웃고 있었지만 그녀는 늘 그녀 옆을 지키던 그 못된 남자 친구를 여전히 잊지 못했다. 어디를 가도 그의 흔적이 그녀에게 손짓을 했다. 가을이 깊어가고 학원제를 끝내고 몇 잔의 맥주를 마시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 갑자기 그녀가 길바닥에 주저앉아 펑펑 울기 시작했다. 너무 화가 나는데 너무 보고 싶어서 아직도 미련이 남은 자신이 너무 바보 같아 눈물이 난다고 했다. 나는 잠시 동안 그녀가 실컷 울도록 가만히 내버려 두었고, 마침내 울음을 그친 그녀의 손을 잡고 그의 집으로 무작정 쳐들어갔다. 그녀와 나는 연거푸 벨을 눌러도 아무런 대답 없는 깜깜한 그의 집 창문을 매섭게 째려보았다. 그리고 약속이라도 한 듯이 우리는 동시에 손에 쥔 조그만 돌을... 까맣게 타들어 갔던 그녀의 마음처럼 새까만 창을 향해 힘껏 던졌다. 한밤의 고요 속에서 와장창 하는 신음소리를 내며 속시원히 깨지는 창문을 뒤로하고 그녀와 나는 죽을힘을 다해 뛰었다. 한참을 뛰어 역 앞에 도착한 그녀와 나는 숨을 헐떡이며 하이파이브를 하고 큰소리로 통쾌하게 웃었다.
그렇게 그녀는 그를 영영 떠나보냈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뒤돌아 보지 않았다. 그녀처럼 아픔을 자신의 힘으로 이겨낸 남자 주인공이 해맑게 웃으며 아이들과 뛰어가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때의 그녀와 내가 보였다. 나도 모르게 눈가에 그렁그렁 눈물이 고였다. 그러다 몇 입 베어 먹지도 못한 에그 머핀과 눈이 마주치자 눈물 한 방울이 뚝 하고 떨어졌다. 오랜만이라 더 애타게 먹고 싶었던 에그 머핀 – 기대하지도 않은 영화에 푹 빠져 잊히기 전에 조금 더 맛있게 먹을 걸 그랬다.
<아네고 에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