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카레
나에게 도쿄는 앞이 보이지 않게 내리던 8월의 소나기다. 그 이유는 도쿄와 나의 잊을 수 없는 첫 만남의 기억 때문이었다. 서른아홉… 마흔을 코앞에 두고 나는 한 번도 꿈꿔본 적이 없는 도쿄로 왔다. 회사를 그만두고 남은 생은 일이 아닌 내가 기꺼이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아 보기로 결심했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작가가 되겠다는 막연한 생각으로, 우선 전문학교에서 2년 동안 일러스트를 배우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망설임 없이 멀지도 그리 낯설어 보이지도 않은 도쿄로, 그것도 뜨거운 8월의 한여름에, 용감하게 첫발을 내디뎠다.
서울보다 백만 배쯤 더 축축 하고 후덥지근한 공기 속에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가 일주일 내내 왔다. 나는 멍청하게 마룻바닥에 양 무릎을 세우고 쪼그려 앉아 창 밖으로 후드득 후두둑 요란한 소리를 내며 쏟아지는 비를 봤다. 그리고 눈을 깜빡이며 생각했다. 아마도 도쿄는 나와 맞지 않는 곳인지도 모른다고. 다시 돌아갈 이유와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이유들이 내 머릿속에서 복잡하게 엉겨 붙으며 교차되었고, 나는 이 뜨거운 날씨와 빗속에 조금씩 기가 꺾이며 병든 닭처럼 지쳐갔다. 그 덕에 날마다 열대야에 잠을 설치고 더운 날씨에 식욕도 바닥이고, 시들시들 말라가는 꼴 보기 싫은 나를 매일 아침 거울 속에서 만나며, 절망에 가까운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랜만에 비가 그치고 티끌 없이 말끔히 닦아 낸 듯 투명한 하늘이 파랬다. 순간 누군가 진정한 ‘하늘색’을 확인하고 싶다면 ‘맑은 날 도쿄의 하늘’을 보라고 했던 말이 기억났다. 그 말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지금의 하늘은 알 수 없는 오묘하고 선연한 광채를 내며 내 눈 속을 꽉 채웠다. 도쿄에 온 후, 처음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무작정 집을 나왔다. 미로처럼 좁다란 골목길을 따라 여전히 후끈한 공기를 참아내며 걸어보기로 했다. 도화지 크기만 한 작은 창문에 옹기종기 촘촘히 모여 앉아 밖을 내다보는 고양이 인형들. 현관문 앞의 조그만 텃밭에 심어 놓은 본 적 없는 여름 꽃들. 베란다의 늘어진 빨래 줄에 주렁주렁 널린 색색의 옷가지들. 이 집 저 집의 나뭇가지 위를 둘레둘레 오가는 참새들… 나는 정적이 흐르는 골목길을 사푼사푼 발소리도 내지 않고 얌전히 걸으며 그들의 사는 모습을 훔쳐봤다.
어느덧 송골송골 이마에 굵은 땀이 맺히고 내리쬐는 폭염의 햇살 아래 나도 모르게 눈앞이 흐려지며 현기증이 났다. 빨간 지붕이 만들어 낸 그늘 속에 잠깐 멈춰 서고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때, 어디선가 향긋한 카레 향이 났다. 그리고 나는 마법에 걸린 듯 그 카레 향을 따라 다시 걷기 시작했다. 도쿄에 온 이후로 줄곧 무뎌진 나의 후각이 아주 오랜만에 맘껏 제 기능을 발휘하는 순간이었다. 덩달아 한동안 너무나 잠잠했던 나의 식욕마저 깨어나 엄청난 허기를 느낀 나는, 빠른 걸음으로 카레향이 나는 곳을 찾아 헤맸다. 저 골목 끝에 일본 드라마 속에서 본 듯한 아담한 가게가 가물가물 보였다. ‘오늘의 런치. 토마토 카레 세트(밥과 우동)’. 입구에 세워둔 키 작은 입간판 위에는 분홍 분필로 이 카레 향의 주범들을 분명하게 써놓았다. 조심스럽게 가게 문을 열고 안을 둘러봤다. 동네 어귀의 작은 카페처럼 아늑하고 차분한 실내에는 몇 개에 테이블이 오손도손 놓여있고 테이블마다 사람들은 별 대화 없이 카레를 먹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주인아주머니는 커튼 사이로 새어 나온 햇살이 선명하게 새겨진 창가의 테이블로 나를 안내했다. 나는 망설임 없이 나를 여기까진 이끈 토마토 카레 세트를 주문했다.‘토마토 카레’란 걸 지금까지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는 나는 한껏 기대에 부풀어 옆 테이블의 접시를 힐끔거렸다. 드디어 내 앞인 차려진 카레를 한 숟가락 떠 입안으로 넣자 나도 모르게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금까지 나를 괴롭히던 고민들을 순간 모두 잊힐 만큼 너무나 맛있었다.
‘카레는 나쁜 기억을 지워준다’ 던 영화 속 대사가 떠올랐다. 그리고 뭐랄까 이렇게 맛있는 카레를 매일 먹을 수만 있다면 도쿄에서 생활이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기분이 좋아진 나는 마냥 신이 나서 정신없이 카레를 먹었다. 어느새 또 비는 창문을 거칠게 두드리며 심술궂게 몰아치기 시작했다. 향긋하게 나를 유혹하던 마법 같았던 도쿄의 카레 –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며 조금 더 맛있게 먹을 걸 그랬다.
<아네고 에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