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물 냉채
“김 ㅇㅇ 씨 되시죠?”점심시간이 끝나갈 무렵에 걸려온 전화 속 주인공은 다짜고짜 물었다. “그런데요. 누구시죠?”나는 전화기를 들고 조용조용 회의실로 갔다. 순간 느낌이 왔기 때문이었다. 분명 스카우트였다. 드디어 나도 직장생활 4년 만에 벌렁벌렁 뛰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고 별 일 아니라는 듯 능청을 떨어가며, 머릿속에서는 신나게 주판을 굴려야 하는 ‘스카우트 전화’란 걸 받게 되었다. 그것도 지금까지 내가 만든 포트폴리오들이 매력적이고 앞으로의 가능성이 커 보이니 좀 더 좋은 조건으로 나를 끌어가고 싶다고 했다. 아마도 최근에 그쪽 회사로 이직한 선배들의 입김이 긍정적으로 작용했으리라. 때마침 뒤죽박죽 썩이게 된 팀과 새로 배정된 광고주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던 나에게 마치 세상이 내 편이 되어 기회를 덥석 안겨준 듯 흥분되었다.
당장 일손이 급했던 그쪽은 다음날 저녁을 먹으며 우선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눠보자고 했다. 부지런히 오늘 끝내야 할 일의 단속을 하고 요리조리 야근을 피해 나는 약속 장소인 모처의 중식당으로 향했다. 식당 입구에서 손거울을 꺼내 들고 얼굴과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천천히 심호흡을 하고 ‘모란 실’이라 적힌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조심스레 문을 여는 순간 나는 '헉'하고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양복을 단정히 빼 입은 어르신들이 한 분도 아니고 네 분 씩이나 쪼르르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에게 전화를 건 부장님부터 이사님과 본부장님 그리고 인사팀장까지… 내가 이직을 위해 면접이라는 명분으로 반듯이 만나야 할 사람들이 풀세트로 모두 모여있었다.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는 나에게 부장님은 부담을 가지지 않아도 되는 다들 편한 분들이며, 이렇게 만나서 인사를 하는 게 요즘 스타일 아니냐며 웃었다.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짓고 둥그런 테이블의 비어있는 나머지 한자리에 앉았다.
간단한 통성명과 직급 소개에 이어 안부와 다를 바 없는 일상의 질문들이 오가고 잠시 후 음식이 나왔다. 가지런히 썰어져 나온 각종 해산물들과 얇게 눌러 저민 고기, 물컹물컹한 젤리 같은 검은색 오리 알 그리고 한가운데를 장식한 해파리냉채가 커다란 쟁반 같은 접시를 보기 좋게 채우고 있었다. 이사님은 긴장부터 풀고 이야기를 시작 하자며 나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그러나 나는 면접인 듯 아닌 듯 알쏭달쏭한 이 낯선 자리에 집중력을 최대한 불러 모으고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아야 했다. 부장님은 내가 맡게 될 광고주와 회사의 비전과 인재관 등을 담담하고 간략하게 설명했다. 아울러, 나에 대해서는 충분히 선배들에게 들어 알고 있으니 별다른 질문은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그렇다면… 벌써 나를 스카우트하기로 잠정적으로 결정을 하고 어르신들을 줄줄이 모시고 나왔단 말인가?’이 말속에 숨겨진 속내를 파악하기 위해 눈을 동그랗게 뜨는 나에게 이사님은 다시 술잔을 권하고 내 앞에 놓인 접시에 커다란 전복을 놓아주었다. 긴장한 나는 쭈뼛쭈뼛 감사의 목례를 하고 옆에 놓인 겨자소스를 듬뿍 찍어 한 입 베어 물었다. 전복을 노랗게 물들인 겨자소스는 코끝부터 알싸한 독침을 쏘며 온 신경으로 퍼져 나갔고 순간 나는 한껏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그런 나를 빤히 보던 이사님은 허허허~ 하고 인자한 웃음을 터뜨렸다. 톡 쏘는 겨자 소스의 습격 이후 난 서서히 긴장에서 무장해제되었고 예상 밖의 즐겁고 유쾌한 저녁식사로 이어졌다. 그리고 나는 새로운 프로젝트와 함께 새로운 둥지로 훨훨 날아가게 되었다. 비밀스러운 선택의 기로에 선 날의 해물 냉채 – 톡 쏘는 짜릿한 그 맛을 즐기며 조금 더 맛있게 먹을 걸 그랬다.
<아네고 에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