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라면
잘 찌지도 잘 빠지지도 않는 체질인 나는 대학을 졸업하기 전까지 늘 일정한 몸무게를 유지해왔다. 그러다 신입사원 연수기간 동안 너무 긴장한 탓인지 체중이 조금씩 줄기 시작했다. 연수 기간이 끝난 후 배정된 팀으로 어색하게 걸어오는 나를 보며 팀장님은 말했다 “저런… 난 허수아비가 걸어오는 줄 알았네. 일단 살 좀 쩌야겠다.”
사내에서도 미식가들이 모여 있기로 유명한 이 팀은... 음식은 무조건 1인 1 접시가 기본이고 나눠 먹거나 남기는 것은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일이며, 말하자면 ‘맛있는 음식을 푸짐하게 잘 먹는’ 팀이었다. 점심시간이면 팀장님은 우리를 모두 모아 놓고 자신이 선별한 오늘의 메뉴를 발표했고 그 메뉴에 동참하고 싶은 사람만 참석하면 되었다. 그렇지만 팀장님은 나는 반듯이 참석해야 한다고 했다. 우리 팀에 온 이상 나처럼 비실비실한 허수아비를 일단 잘 먹이기는 게 자신의 의무라고 했다. 팀장님의 메뉴는 하나같이 너무나 맛있었다. 언제나 푸짐한 양 덕에 과식을 하고 속이 불편하기도 소화제를 먹기도 했지만, 팀장님과 함께 하는 점심식사는 그 모든 걸 잊을 만큼 맛있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아침… 오랜만에 꺼내 입은 정장 바지가 잠기지 않는 순간, 나는 엄청난 충격에 빠졌다. 어느새 두툼해진 나의 뱃살 덕에 숨을 한껏 들이쉬고 배에 힘을 주어도 좀처럼 잠기지 않았다. 전신 거울에 이리저리 몸을 돌려가며 비춰보니 역시 나는 살이 찐 거였다. 게다가 조금이 아니라 아주 많이… 그다음 날부터 갑자기 우울해진 나는 팀장님의 점심식사에 다른 핑계를 만들어내기 시작했고, 이제는 허수아비에서 벗어났으니 나에게도 결정권을 달라고 졸랐다. 설상가상으로 퇴근길 버스정류장에서 우연히 만난 대학 동기는 깜짝 놀라며 예전보다 통통해진 나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스캔하느라 바빴다. 나와 같은 버스를 탄 그녀는 자신의 회사에 결혼을 앞두고 엄청나게 살을 뺀 선배가 있는데 그 선배가 요즘 한참 유행하는 다이어트 식품을 먹고 날씬해졌다며 신이 나서 수다를 떨었다. 나는 그저 무심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신문광고를 뒤져 그 유행한다는 다이어트 식품회사의 전화번호를 찾아내고 다음날 출근하자마자 전화를 걸어 상담 날짜를 잡았다.
점심시간을 틈타서 마치 첩보 작전처럼 회사에서 조금 떨어진 카페에서 상담원을 만나 앞뒤로 빽빽한 설문지를 작성하고, 그녀에게 일주일 치의 다이어트 식품을 샘플로 받아 들고 회사로 왔다. 그 후 나는 점심시간마다 팀장님의 미식투어에 갖은 이유를 만들어 불참했고, 몰래 탕비실에서 미지근한 생수에 가루로 된 다이어트 식품을 풀어 헛구역질을 해가며 마셨다. 그렇게 삼일을 버티자 배는 조금 홀쭉 해진 것 같았으나 기력이 없고 오후 시간이면 맥없이 졸기도 했다. 그래도 이왕 결심한 것이니 참고 버텨볼 요량으로 주말 약속도 모두 포기하고, 주린 배를 진정시키며 침대 위에 널 부러져 하루 종일 리모컨을 눌러댔다. 그러다 나는 까무룩 잠이 들었고 새벽에 눈을 떴다. 너무 배가 고팠다. 잠시만 참으면 괜찮아질 거라는 생각에 눈을 꼭 감고 이불을 뒤집어써봤지만 그 순간, 주마등처럼 팀장님과 먹었던 맛있는 음식들이 머릿속에서 줄줄이 지나갔다.
무언가를 먹지 않으면 당장 미칠 것 같았던 나는 벌떡 일어나 냉장고를 뒤졌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었다. 음식이라 곤 사전에 싹 없애버린 텅 빈 냉장고에는 플라스틱 통에 담긴 엄마의 묵은 김치가 전부였다.‘그렇다면, 라면이라도 끓이자. 라면도 다 치워버린 것 같은데…’ 그러나 이 허기를 향한 놀라운 집념은 작년에 팀원들과 간 가을 산행에서 남겨온 라면 한 봉지를 배낭 속에서 끝끝내 찾아내고 말았다. 급히 라면 물을 올리고 엄마의 김치를 송송 쎃어넣고, 또 극적으로 발견한 계란 한 알을 보글보글 익어가는 라면 위에 톡 하고 깨뜨려 넣자, 작은 주방은 라면 냄새로 꽉 찼다. 마음이 급해진 나는 냄비 뚜껑에 꼬들꼬들 한 면과 김치를 올려 한입에 후루룩 먹었다. 지금 내가 먹은 이 라면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라면이라는 엄청난 감격이 밀려오는 순간, 갑자기 뱃속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일주일 내내 밍밍한 다이어트 식품과 물에만 길들여진 나의 위장은 갑자기 치고 들어온 이 자극적인 음식에 강하게 반항을 했다. 끝내 절반도 채 먹지 못하고 화장실로 달려가고 말았다.
잠시 후, 퉁퉁 불어 터진 나의 소중한 라면을 슬픈 눈으로 봤다. 배고픈 밤에 극적으로 끓여낸 김치라면 – 다이어트는 무슨… 조금 더 맛있게 먹을 걸 그랬다.
<아네고 에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