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코아
대학교 3학년의 되던 봄날, 개강과 함께 나의 흑기사들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죄다 약속이나 한 듯이 동시에 휴학 계를 내고 어색해진 짧은 머리를 하고 나타나 나에게 취중고백 같은 작별인사를 한 후... 캠퍼스에서 자취를 감췄다.
여학생보다 남학생이 압도적으로 많은 과에 입학한 탓에 나는 어울리지 않는 호사를 줄곧 누렸다. 인기 있는 교양 수업의 수강신청을 대신해주는 것은 물론이고, 구하기 어려운 전공과목의 족보를 구해 복사를 해주기도 하고, 시험기간이면 새벽부터 줄을 서야 겨우 한자리 잡을까 말까 하는 도서관의 개인별 열람실 자리가 이미 내 자리가 되어 나를 기다렸다. 그 어렵고 귀찮은 일들을 나를 위해 기꺼이 대신해 주는 든든한 흑기사들을 과 동기로 두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사라진 후, 나는 처음으로 캠퍼스를 함께 거닐 친한 여자 친구들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후회했고 강의가 없는 시간이면 도서관으로 쓸쓸히 숨어들었다. 중간고사가 끝나갈 무렵, 서클 활동을 잠깐 같이 했던 의상학과에 다니는 새침한 그녀와 도서관의 여자화장실에서 거울을 보며 화장을 고치다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그동안 어떻게 지냈냐’고 호들갑을 떨었고 ‘내일 저녁에 시간이 괜찮으냐’고 뜬금없이 물었다. 나는 시험도 낼 오전이면 전부 끝나니까 괜찮다고 말했고 그녀는 다정하게 내 팔짱을 끼며 내일 자신의 생일파티에 오라고 했다.
인연은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냥 내 앞으로 예고 없이 걸어 들어오는 거라고 누군가 그랬다. 그녀의 생일파티를 위해 카페식 주점에 모인 우리는, 그 당시 여자들을 위한 술로 핫 했던 레몬 소주를 벌써 두 주전자나 비우고도 여전히‘술 먹기 게임’에 열을 올리는 중이었다. 어느새 비워진 주전자를 채우기 위해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렸고 그때 내 눈 앞으로 키가 훤칠하게 큰 얇은 금테 안경을 쓴 하얀 얼굴의 그가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걸어왔다. 내 눈을 보며 말했다. “저희는 같은 학교 학생인데, 술 한잔 같이 하면 어때요? 만약 괜찮으시면 레몬 소주를 싫으시면 그냥 소주를 시키시면 돼요.”할 말을 끝낸 후 그는 일행이 있는 자리로 재빨리 돌아갔다. 오늘 파티의 주인공인 그녀가‘무슨 일 이래’를 연발하며 웃음을 터뜨렸고 그녀를 따라 환하게 웃는 나머지 여인들을 보면 내가 주문해야 할 술은 분명 레몬 소주였다. 그렇게 합석을 한 모두는 어색함을 깨기 위해 각종 게임들을 섭렵했고 더 취기가 오르기 전에 근처 카페로 옮겨 따뜻한 차를 마셨다. 나는 코코아를 주문했다. 그날따라 빈속에 마신 술 때문인지 달달한 초콜릿 우유가 마시고 싶어 졌다. 11시 반이 다 되어서야 카페를 나와, 각자 막차를 타거나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갔다.
그리고 며칠 뒤, 대학로에서 스터디 그룹의 멤버들과 모임을 끝내고 마로니에 공원을 걸어가는데 내 눈앞으로 어디서 본듯한 누군가가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 거침없는 걸음걸이는 마치 나를 만나러 오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를 물끄러미 처다 보았다. 그는 나에게 손을 내밀며 너무 반갑다며 다시 꼭 만나고 싶었다고 말했다. 대학로가 내려다 보이는 카페에 마주 앉은 그와 나는 그날의 끝자락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그는 줄곧 내 옆자리였고 산만하게 여러 사람들과 이야기를 이어가는 나에게 틈틈이 말을 걸었다. 그는 헤어지기 전 전화번호를 적은 메모를 건네려는 순간, 막차를 발견한 내가 급히 뛰어가 버렸다고 했다. 오늘의 우연이 그는 인연이라고 말하며 웃었다. 그리고 나를 위해 코코아를 주문했다. 나는 꼬마 솜뭉치 같은 마시멜로가 동동 떠있는 뜨거운 코코아를 조심스럽게 불어가며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마셨다.
그 후 일 년이 지났고 나는 광고회사의 인턴이 되었고 복학생이었던 그는 여전히 대학생이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탓에 약속을 식은 죽 먹듯 어기는 나를 한없이 기다리며 그는 나를 위해 코코아를 주문했다. 그와 헤어지기로 마음을 먹는 그날도 나는 그가 주문한 코코아를 마셨다. 몇 모금 마시지도 않고 피곤하다는 핑계로 일어서려는 나를 그가 붙잡으며 말했다. “마지막 이잖아. 이것만 다 마시고 가.”아직 내가 입 밖으로 꺼내지도 않은 이별을 그는 벌써 눈치채고 있었다. 나는 순간 울컥 거리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하고 벌떡 일어서 밖으로 뛰쳐나오고 말았다.
미안하다는 말 조처 꺼내지 못했던 날, 그의 마지막 부탁 같았던 코코아 – 한참을 멍하니 자리를 지키던 그를 위해 마지막 한 방울까지 조금 더 맛있게 먹을 걸 그랬다.
<아네고 에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