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마약 같은

마약 김밥

by anego e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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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막히던 여름은 끝이 났지만 잊을만하면 다시 나타나 기승을 부리는 끈질긴 늦더위 덕분에, 긴팔과 반팔을 오락가락하며 지금이 가을인지 여름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어느덧 10월이 찾아왔다. 오늘 새벽녘 처음으로 발끝에서부터 오싹하게 느껴지는 서늘한 한기에, 나는 이제야말로 가을이 아직도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여름을 완전히 몰아냈음을 확신했다. 질척대던 여름 이불을 모조리 치우고 감촉이 좋은 얇은 연두색 담요를 꺼내 침대 위에 접어놓고, 점심 약속을 위해 기분 좋은 샤워를 했다.


나는 잠시 후, 가을을 향한 나의 애끓는 마음을 달래줄 노랗게 익어가는 은행나무와 어느새 조금씩 붉어진 단풍들로 둘러싸인 석촌 호수를 내려다보며 지인들과 함께 근사한 브런치를 먹을 예정이었다. 그런데 솔직하게 고백을 하자면, 생각만 해도 두근거리는 이 브런치보다 여름 내내 축 처진 내 입맛을 자극하는 건 따로 있었다.


맛집 블로거인 지인이 전화기 너머로 최근에 발견한 브런치 레스토랑이 석촌호수 근처라고 내뱉는 순간, 내 머릿속에는 잠실 역 지하상가의 분식집이 자동으로 떠올랐고, 그녀가 그 레스토랑의 노른자를 촉촉하게 품은 수란이 올려진 에그 베네딕트가 얼마나 환상적인지를 설명하는 동안, 나는 그 분식집의 단무지와 조린 우엉, 당근을 넣고 길쭉하게 만 마약 김밥과 그 집만의 특제 겨자소스를 생각하며 군침을 삼켰다.


오늘 나의 계획은 우선 약속시간 30분 전에 잠실 역에 도착해 마약 김밥을 산후, 경치 좋은 호수 근처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애피타이저로 마약 김밥을 먹는 거였다. 서둘러 집을 나와 잠실 역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 인지라, 평일 오전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따라 버스는 꽉 막힌 도로에서 명절날 고향 가는 고속버스처럼 찔끔찔끔 움직였고, 심지어 모든 신호들은 시뻘건 눈을 부릅뜨고 가는 길마다 막아 세웠다. 벌써 출발한 지 40분이나 지났지만 목적지에는 절반도 가지 못했다.


이런 상황이라면 나의 계획은 성공적으로 실행되기 어려워졌고, 나는 저 멀리 희미하게 흔들리는 롯데타워를 보며 고민에 빠지기 시작했다. 마약 김밥을 포기하고 곧바로 약속 장소로 갈 것인가, 아니면 조금 늦더라고 일단 김밥을 사 약속 장소로 가면서 몇 개를 얼른 집어먹을 것인가. 다 큰 나이 든 여자가 길거리에서 김밥을 우물거리는 건 좀 그런가? 그렇다면 사 들고 간 김밥을 레스토랑의 양해를 구하고 모두와 나눠먹을까? 그것도 아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김밥과 에그 베네틱트의 겸상은 어울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브런치를 먹고 석촌 호수 산책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김밥을 사서 먹는 건? 그것도 쉽지 않을 듯했다. 분명, 쇼핑을 가자고 누군가는 조를 것이고 그렇게 되면 다시 잠실 역으로 한참을 되돌아 가야 했다.


조금씩 속도를 내는 버스 안에서 나는 누구도 해결해줄 수 없는 나만의 심각한 고민에 빠져 눈과 귀를 순간 닫았고 말았다. 한참이 지나‘지금 어디쯤이냐’는 지인이 보낸 문자에 요동치는 핸드폰을 가방에서 꺼내면서, 내려야 할 정거장을 세 개나 지나쳤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약속 장소에 30분이나 늦게 도착한 나는 미리 주문해 놓은 에그 베네틱트 위의 수란을 뒤적이며 알 듯 말 듯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나의 마약 김밥을 향한 어처구니없는 집착이 불러온, 나만 아는 이 우스꽝스러운 일련의 사태들을 몰래 떠올리며 피식피식 웃고 말았다. 눈치 빠른 지인이 “버스에서 재미있는 일이라도 있었어? 그래서 늦은 거야?”하고 말하며 내 접시 위로 샐러드를 덜어 주었다. “글쎄다. 재미있는 일은 아니고 생각할 게 좀 있어서 정류장을 깜빡 지나 쳤어.”하고 답하는 나에게, 또 다른 지인은 나와 눈을 다정하게 마주치며 말했다. “심각한 생각에 빠지면 다 그렇지 뭐.”그녀의 말에 나는 또 웃음을 터뜨렸다.


예상대로 쇼핑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끝끝내 미련을 버리지 못한 나는, 집까지 태워주겠다는 지인의 호의를 마다하고, 한참을 다시 돌아와 마약김밥을 사들고, 해가 지는 석촌 호수의 벤치에 앉아 검지 손가락만 한 김밥을 소스에 찍어 입 속으로 넣었다. 김밥을 우걱우걱 씹으며 갑자기 또 웃음이 났다. 나는 오늘 이 김밥이 왜 그렇게 먹고 싶었던 걸까? 나의 식탐을 끈질기게 마약처럼 자극하던 마약김밥 – 어쨌든, 가을의 정취를 만끽하며 미련 없이 조금 더 맛있게 먹을 걸 그랬다.


<아네고 에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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