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래떡 구이
마흔이 넘어가면… 우리는 자신과 어울리는 곳을 개성도 취향도 아니라 그저 나이라는 일차원적인 잣대를 기준으로‘가도 되는 곳과 안 되는 곳’ 두 가지로 구별한다. 특히 길거리에 가만히 서있기만 해도 사방에서 쏟아지는 시끄러운 음악이 정신을 쏙 빼놓는 ‘홍대 같은 곳’은… 절대 우리들과 어울리지 않는 암묵적인 금지구역이 되고 만다. 그러다 가끔씩, 초고속으로 엔도르핀을 높인 알코올의 힘과 철없는 아이 같은 누군가의 생떼가 더해지면…‘그래, 까짓것 가자’하고 큰 소리를 치며 금지된 그곳으로 어쩌다 가게 된다.
그날도 그랬다. 불타는 금요일을 핑계로 광화문 독거노인 모임의 리더인 나의 오피스텔에 모여 아껴 놓은 샴페인을 따고 원 플러스 원으로 마트에서 사 온 와인 2병을 거의 비워 갈 무렵, 우리 모임에서 가장 어린 그녀가‘홍대 클럽’을 큰 소리로 외치기 시작했고, 손사래를 치는 나를 억지로 일으켜 세워 택시 안으로 사정없이 떠밀었다. 우리는 클럽 입구에서 입장료를 내고 무표정한 덩치 큰 청년이 팔목에 매어주는 종이 팔찌를 차고 지하로 내려갔다. 들어본 적 없는 최신 곡들이 흐를 거라는 예상과 달리 클럽에는 내 귀에 익숙한 90년대 음악들이 흘렀다. 이미 적당히 마신 술은 우리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했고 나보다 몇 살 더 어린 그녀들은 입구에서부터 어깨를 들썩거리며 신이 났다. 그녀들은 주책없이 내 손을 끌고 무대의 중앙으로 용감하게 파고들었다. 다행히 어두운 조명 덕분에 주변보다 나이 든 내 얼굴은 가려졌지만, 노래 한 곡이 끝날 때마다 숨을 헐떡거리는 이 저질 체력은 숨길 수 없었다. 그녀들은 아직 워밍업에 불과한데 나는 이미 지졌고 목이 타들어 갔다. 나는 입장료에 포함된 맥주 한 잔을 마시기 위해 바에 줄을 섰다. 노는 것도 이제 힘이 든다는 조금 서글픈 생각을 하면서 차가운 맥주 한 잔을 받아 들고 구석의 빈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물을 탄 듯 밍밍한 맥주 한 모금을 삼키고 저 멀리 보이는 그녀들에게 손을 흔드는 내 앞으로 한 남자가 다가왔다. 이 자리의 주인이었다. 그러고 보니 동그란 테이블 위에 간단한 마른안주와 마시다 만 맥주잔들이 놓여있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남의 자리를 떡 하니 차지하고 있었던 거였다. 놀란 마음에 벌떡 일어서는 나를 이 남자가 멈춰 세우고 다시 앉혔다. “괜찮으니까 앉아요. 체력이 달려 힘든 거죠? 저 또한 그래요. 후배들 못 따라가겠어요.”그렇게 서로의 떨어지는 저질 체력으로 말문을 튼 우리는 쿵쾅 거리는 시끄러운 음악 속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큰 소리로 웃기도 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낯선 남자 앞에서 친구처럼 마음이 편안하고 침착했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나는 한참 놀기 바쁜 그녀들을 잠시 버려두고, 만난 지 30분도 채 되지 않은 이 남자와 클럽을 몰래 빠져나와 술을 한잔 하기로 했다. 불타는 금요일답게 젊음의 열기가 미친 듯이 타오는 홍대의 밤거리를 약간의 거리를 두고 걷다 가 골목 끝의 한적한 이자카야를 발견하고 들어갔다. 토닉워터와 레몬을 짜넣은 일본식 칵테일과 출출해진 배를 채울 가래떡구이를 주문했다. 뻔한 자기소개를 시작으로 그저 그런 일상의 이야기가 이어졌고, 나는 이 낯선 우연에 대한 특별한 긴장감도 없이 유쾌한 분위기에 서서히 취하고 있었다. 그러다 한 시간이 금방 지나갔고 남겨놓고 온 그녀들에게서 문자가 줄줄이 오기 시작했다.
이제 그녀들에게 돌아가야 했다. 나는 쫄깃쫄깃한 가래떡 하나를 조청에 찍어 입안에 얼른 넣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나를 따라 일어서며 자신의 명함을 건넸다. 그리고 말했다. “편안한 친구가 되면 좋겠는데…”나는 그가 내민 명함을 가만히 보며 입 속의 가래떡을 꼭꼭 씹었다. 나는 나이가 들어 갈수록 단지 약간의 호감으로 새로운 인연의 손을 잡는 게 망설여졌다. 가볍게 끝날 인연이라면 시작도 정리도 이제는 귀찮아진 거였다. 그와 함께 클럽으로 돌아가며 한 손에 움켜진 명함을 꼬깃꼬깃 접어 청바지 뒷주머니 속에 쑤셔 넣었다.
서로의 일행에게 돌아가며 우리는 마지막으로 눈인사를 나누고 가볍게 악수를 했다. 짧았던 우연과 나눠먹은 유난히 쫄깃쫄깃했던 가래떡 구이 - 혹시라도 인연이 될 가능성을 곱씹으면 조금 더 맛있게 먹을 걸 그랬다.
<아네고 에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