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궁을 살려 말어?'
제법, 섬뜩하게 들리는 이 말은
주먹만 한 자궁 속에 생긴
10센티가 넘는 근종을 제거하기 위해
생애 첫 수술을 앞둔 저에게...
백발이 성성한 산부인과 전문의인
노의사가 던진 무덤덤한 질문이랍니다.
그래요. 이 악의 없는 고약한 질문은
수술이라는 엄청한 해프닝을 치른 기념으로
여자가 맑아진다는 그날을
앞으로 영영 잊고 사는 것을
몇 년 앞당겨 줄 수 있다는 것이죠.
그 순간, 마음속으론
'저런 질문을 서슴없이 나에게 해도 되는 것인가?
미혼이라고 분명히 진료차트에 쓰여있을 텐데...'
하는 불쾌한 생각이 들었죠.
그러다가, 어차피 결혼은 다음 생에 하기로
마음을 먹었으며 혹, 결혼이란 걸 하게 되더라도
이 나이에 출산은 엄감 생신이니
이참에, 매달 치러야 하는 번거로운 행사를
끝내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죠.
대답을 망설이는 저를 빤히 보던 노의사는
" 천천히 생각해보고 수술 전날에 알려줘 ~"
하고 별일도 아니라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저를 돌려보냈죠.
병원에서 집까지 제법 거리가 되는 길을
투벅투벅 걸으면서 생각하고 또 생각했죠.
'이제 나는 여자로서 끝이구나...
갱년기, 남의 일이 아니구나'
마음이 서늘해지다가
이상하게도 금세 침착해졌답니다.
그리고 제 마음이 진정
원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죠.
자궁 따위는 더 이상 필요 없다고
제 마음이 속삭인다면
그렇게 해도 괜찮다고 다독이며
태엽을 감은 로봇처럼
무작정 앞으로 걸어갔답니다.
그리고 그다음 날,
저보다 서넛 살이 위인 선배 언니에게
전화를 걸어서, 지금의 상태와 고민을
털어놓았죠. 언니는 발끈하며
" 당연히, 인생 모르는 것이데
근종만 제거해 달라고 해."하고
쐐기를 박았죠. 그리고 최근에
폐경을 맞은 자신에 관해
수다를 떨기 시작했죠.
얼굴이 화끈거리고
자주 열이 나고, 심장이 갑자기
벌렁 되기도 하고,
감정이 널뛰기도 한다고요.
그래도, 매달 귀찮은 일은
하나 줄어서 그건 좋다면서
스스로를 위로하듯 유쾌하게 깔깔 댔죠.
제법 큰 근종 때문에
저는 수술 후 일주일간 입원을 하고
무사히 퇴원을 했죠.
4년이 지난 지금, 저는 이제
더 이상 마트에서 원 플러스 원하는
생리대를 살 필요가 없게 되었고,
서서히 본능적으로 감지하던
그날에 무뎌지고 있답니다.
어쩌다 똑똑한 애플 워치가
저의 주기를 알려 줄 때를
제외하고 말이죠.
다행히, 최근에 한 호르몬 검사에서
아직도 여성 호르몬의 수치가
비교적 높은 편이라
갱년기 증상을 심하게 겪지 않고
넘어갈 확률이 높다고 했죠.
그 덕분인지, 아직까지는
별다른 증상이 감지되지는 않았답니다.
단지, 예전보다 입맛이 없고
뭘 해도 시큰둥 하기는 하지만
이것은 단지 봄을 타는
증상에 불과한지도 모르니깐요.
연인들에게 달콤한 날이었던 어느 날 오후...
올해 아들을 대학교에 보낸
친구 K가 집 근처로 갑자기 놀러 왔죠.
오랜만에 건 안부전화에
제 목소리가 심상치 않을 걸
눈치채고 샤르도네 한 병을 사들고
근처 와인바에 먼저 자리를 잡고
무작정 나오라고 으름장을 놓았죠.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부스스한 얼굴에 간단히 화장을 하고
아직도 생기 넘치는 그녀가
기다리는 와인바로 향했죠.
커다란 통 참문 너머로
저를 발견하고 힘껏 손을 흔드는
그녀의 환한 얼굴을 보자,
아주 오랜만에 가슴이 두근두근
설레었답니다. 마치 연인을
만나러 가는 것처럼 말이죠.
꽃을 좋아하는 그녀는
저에게 프리지어 꽃다발을 내밀고,
"연인만 달콤하란 법 있냐?
친구끼리도 이제 좀 달콤하자"
하고 말하며 호탕하게 웃어쟀겼죠.
와인 몇 잔에 발그스레해진
볼 빨간 갱년기인 두 여인의 화이트데이는
그 어떤 때보다 달콤했답니다.
어쩌면 말이죠,
이제부터야 말로 여자가 아닌,
진짜 성숙한 내가 되는
또 한 번의 시작일지 몰라요
어쩌면 말이죠
이제부터야 말로 거침없이,
마음껏 훨훨 날개를 펼쳐도
되는 그런 때 일지도 몰라요.
< 남은 생 잘 먹겠습니다 >
아네고 에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