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어먹을 오십 살

by anego e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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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가 크면 실망이 크다고 했나요?

저에게 이상한 징크스가 있답니다.

뭐냐 하면요... 두근두근 고대하며

기다리던 그날을 코 앞에 두고

꼭 사건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저의 신변에 관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면 복 없는 저를 탓하면 그만일 테죠)

대부분 저의 주변에 관한 것이었죠.


예를 들어, 학창 시절의 하이라이트인

수학여행 전날, 부부싸움을 대판 한 엄마는

살갑게 요것 저것 가방을 챙겨주던

언니와 오빠의 그날과 달리

방문을 틀어 잠근 채 나오지도 않고

밤새 울분을 참지 못한 아빠는

' 잘 다녀 오라'는 말 한마디 없이

새벽 댓바람부터 휑하니 출근을 해버리십니다.

어린 마음에 어찌나 서운하던 지요.

꼬맹이 동생의 배웅을 받으며

아파트 공터에 줄줄이 들어선

관광버스에 오를 땐,

눈물까지 찔끔 났지 뭐예요.

그때의 저에겐 수학여행은

정말로 손꼽아 기다리던 로망이자

멋진 이벤트였거든요.


감격스러운 고교 졸업식을 하던 날은 또 어땠게요.

당당히 원하는 대학에 합격한 딸을

한껏 자랑스워하며, 친구들과 맛있는 걸

사 먹으라고 통 크게 용돈을 주는

부모님의 모습을 상상하며

전, 기대에 부풀었답니다.

그러나, 또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큰집과 외갓집에 각각 일이 생기는 바람에

엄마는 서울에 있는 외삼촌 네로

아빠는 첫차로 시골 큰집으로 가야 했답니다.

결국, 졸업식장에는 근처에 사시는

외숙모가 꽃다발을 들고 오셨죠.

그간 고생했다고 저를 꼭 안아주는

외숙모의 품에서, 저는 서글픈 마음에

눈물을 펑펑 쏟고 말았답니다.

이런 행사를 앞서 두 번이나 치른 부모님에게는

(저는 사 남매 중 세 번째입니다)

꼭 그날이 아니라도 언제든지

실컷 축하를 해줘도 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요.


이런 종류의 나 홀로 서글펐던 일들은

기대가 클수록 어김없이 일어나곤 했는데요

그래서인지, 어느 순간부터 저는 웬만하면

기대라는 걸 하지도 않으며

담담하게 살기로 결심을 했답니다.

그런데 말이죠, 제가 정확히

50년을 살게 된 그날은... 즉슨 저의

50번째 생일만은 좀 특별하게

보내고 싶은 기대가...

아주 오랜만에 생겼답니다.

좋아하는 샤르도네를 마시며

오랜 지인들과 손때 뭍은 추억담을

시끌벅적 요란하게 쏟아내며

남은 생을 살아갈 수 있는

용기와 에너지를 얻고 싶었거든요.


그러나, 인생이 어디 내 맘대로

흐르던가요. 가족보다 더 한 우정을

이어가던 그녀는 몇 달 전 사소한 오해로

서먹해졌으며, 언제나 활기차던 업계

후배들은 최근 경영난에 허덕이며

좀처럼 웃는 얼굴 보기가 어려워졌고,

대학 후배이자 오랜 직장 동료였던

그녀는 아들의 진학 문제로

한 달째 외국에 채류 중이고...

모두 약속이나 한 듯, 원치 않은

뜻밖의 대소사에 정신이 없지 뭐예요.

서운한 생각보다 안타까운 마음이 앞서지만,

저도 모르게 큰 한숨을 내쉬며

혼잣말을 내뱉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네요

'역시, 기대라는 건 애당초

하지 말았어야 했어. 그걸 한 내 탓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어먹을 50살은

그냥 넘어갈 수 없기에...

저는 미국에 있는 단 하나뿐인

베프와 영상 통화를 하며

제법 근사한 샤르도네 한 병을

환한 대낮부터 마실 생각이랍니다.

잔잔한 주름이 적나라하게 보이는

화장기 없는 맨 얼굴을 당당히 드러내며

그녀에게 말하고 싶을지도 몰라요.

" 친구야, 너라면 나를 좀 알지?

50년간 나름 열심히 살았다."


<남은생은 잘 먹겠습니다>

아네고에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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