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배송도 쓱 배송도 좋지만
가끔은 북적대는 동네 마트에서
마치 한가족의 식탁을 책임지는
주부처럼 찬찬히 장을 볼 때가 있죠.
그때마다 저를 부르는 호칭은 참 다양하답니다.
얘기 엄마, 사모님, 누님...
어떻게 불리든 아무렇지도 않은
나이가 된 저는, 불리는 호칭에 맞게
" 아.. 애들이 좋아하겠네요"
" 주말에 해 먹음 맛있겠네요"
" 어머나, 싱싱하니 피부에 좋겠어요"
하고 말을 건네고 빙긋 웃곤 합니다.
'이런 게 뭐 사는 소소한 재미지 ~'
하는 생각을 하면서요.
그리 크지 않은 마트지만
가지런히 정리된 야채 코너를 돌면서
제철 야채를 뭘 좀 아는 듯
요리조리 돌려보며 만지작 거리기도 하고
냉장고에 잊지 않고 챙겨두는
토마토의 가격을 비교하기도 하죠.
그렇게 마트를 3분의 2쯤 돌면
유달리 사교성 좋은 생선코너의 직원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때마다 저를
알은 채 하며 애교 넘치는 인사를 건넨답니다
" 오늘은 홍합, 안 드세요? "
작년 겨울이었던가요
유난히 식욕도 의욕도 바닥이었던 저는
일주일에 몇 번이고 홍합을 삶아 먹었답니다.
겨울이 제철인 홍합은 알도 크고
값도 저렴할뿐더러, 그저 물을 붓고
삶기만 해도 되는 초 간단 요리이죠.
삶은 홍합을 적당히 식힌 후에 차갑게
서리가 낀 샤도네 한잔을 곁들이면,
무기력으로 침묵하던 저의 하루가...
그 순간 조금은 힘을 내며,
저를 위로하는 것 같았거든요.
" 괜찮아. 이럴 때도 있지" 하면서 말이죠.
그러고 보니, 카피라이터 신입사원을 뽑는
실기시험에서 홍합에 관한 과제가
나왔던 적이 있었네요
'홍합'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를
단어 혹은 짧은 문장으로
표현해 보라는 것이었는데...
저는 그 순간, 홍합? 포장마차 안주?
홍합탕? 이런 일차원 적인 것들을
떠올리며 골머리를 썼죠
그때 제가 뭐라고 써냈는지는
가물가물 하지만, 입사 동기인 K군의 답은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이 난답니다.
몇 주 동안의 연수기간이 끝나고
선배들이 사주는 맛있는 저녁을 먹고
동기들끼리 간 포장마차에서
테이블마다 기본으로 제공되는
우동 그릇에 담긴 홍합을 빤히 바라보던 그는,
앞자리의 저에게 말했죠
" 아.. 홍합... 뭐라고 썼어요? "
저는 무심하게 잔을 비우며
" 기억하고 싶지도 않아요.
뭐.. 대단치도 않았고요"
그러자 그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죠.
" 저는요.. 유난히 빛났던...
그녀의 까만 눈동자..라고 썼어요"
홍합을 보며 먹을 생각뿐이었던 저와 달리
첫사랑 그녀의 까만 눈동자를 따 올린 그는
그 당시 가장 핫했던 통신 광고 팀으로 발령이 났고
저는 " 그래 이 맛이야"를 여러 가지 버전으로
반복해야 하는 식품 광고팀으로 발령이 났답니다.
날마다 후덥 해지는 초여름에도
마트의 한 코너를 차지하고 있는
홍합이 기특하고 고마워서 오늘도
한 팩을 집어 들고 돌아서는 저에게,
입담 좋은 직원이 기분 좋은
한마디를 건네지 뭐예요.
" 누님 때문에 홍합은 꼭 갖다 놓습니다.
자주자주 드셔주세요"
<남은생 잘 먹겠습니다>
아네고 에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