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의 소녀시대 [2]
우정도 사랑도 쉬웠던 시설 -
저는 친구가 아주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날마다 약속이 없으면
하루를 도둑맞은 것처럼
허전했으니까요. 아침에 눈을 뜨면
만나야 할 사람들을 떠올리고
인심 쓰듯이 제 시간을 나눠주며
혼자 있는 시간을 최대한 줄여가면서
살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혼자 보내는 시간이 함께 보내는 시간보다
몇 배는 더 많이 진 지금 -
가끔은 시절의 인연이 되고 만
그 친구들이 그리워집니다.
어쩌다 우연히, 거짓말처럼
딱 마주치기를... 그리고
단박에 서로를 알아봐 주기를…
물론, 제 욕심이자 씁쓸한 바람이겠지요.
이 책의 저자인 마리처럼
찾아 나설 용기도 내지 못하면서 말이죠.
마리는 유년시절을 일본 공산당원인
아버지 덕분에 프라하에서 보내게 됩니다.
러시안 인들이 운영하는
그곳의 소비에트 학교에서
까만 눈의 그리스인인 리차를 만나게 됩니다.
망명한 아버지 덕분에 리차는
루마니아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늘 모국인 그리스를 끔찍이도 그리워하지요
" 그건 말이야, 정말 쨍하고 깨질 듯이 파래 "
한 번도 봤을 리가 없는 그리스의 하늘을
너무나 자랑스러워하면서 말이죠.
매력적인 외모 덕분에
학교의 최고 인기 남이자 바람둥이
오빠를 둔 탓인지 리차는
남녀의 은밀한 데이트에 관해서도
개방적이고 거침이 없었죠.
늘 그녀의 곁에서는 호기심 천만한
소녀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답니다.
소심하고 겁이 많았던 마리는
공부 빼곤 뭐든 척척이 었던
리차의 이런 호탕한 모습에 끌려
그녀의 단짝이 되지요.
그러고 보면, 자신과 상반된 성격에
더 끌리게 되나 봅니다.
저 멀리 미국에 있는 저의 하나뿐인 베프도
떠들기 좋아하는 저와 달리
가만히 듣는 걸 좋아하지요.
큰 눈을 깜빡이며 간간히 미소를 짓다가
갑자기, 제 어깨를 툭 치며
웃음을 터뜨리곤 했는데...
마치 꽃이 만개하는 것처럼 환했던
그녀의 얼굴이 너무나 좋아서
더 열심히 이야기를 하곤 했죠
아.. 갑자기 그녀가 너무 그리워집니다.
일본으로 돌아가게 된 마리처럼 말이죠.
아버지의 임기가 끝나 일본으로 돌아온
마리는 날마다 프라하를 그리워하며
리차에게 편지를 쓰곤 했지요.
시간은 야속하게도 눈 깜짝할 사이에
20여 년이 흐른 후 어느 날, 문뜩
리차가 몹시도 그리워진 마리는 무작정
프라하의 소비에트 학교로 찾아갑니다.
인생에서 한번쯤은 그 순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반드시 생기기 마련이지요.
마음이 요동친다는 증거입니다.
모든 것이 그대로이지만
그 시절 그곳에 머물었던 사람들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죠.
리차를 만나고 싶은 간절함과
파란 하늘을 올려다볼 때면 울컥 치밀어 오르던
소녀시절을 향한 그리움을 떠올리며
마리는 물어물어 리샤의 흔적을
애타게 찾아 헤맵니다
그리고, 학교 옆 작은 사탕가게를 운영하던
터키인의 도움으로 리차의 연락처를
극적으로 손에 얻게 되지요.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그리운 목소리 -
바로 프라하의 리차였습니다.
도심 근교의 이민자를 위한
작은 진료실을 운영하는 리차는
이민 노동자인 후덕한 남편과의 사이에서
두 아들을 둔 의연한 엄마가 되어있었죠.
오빠의 철없는 결혼이 몰고 온 집안의 몰락과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 등...
그간의 사연을 쉼 없이 털어놓으며
리차는 눈물을 글썽였지요.
세월은 리차를 원하지 않은 방향으로
가게 했지만, 결국 그녀는 자신만의
행복을 찾아내고 평온한 일상을
누리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거실에 놓인 커다란 티브에서는
연신 그리스의 방송이 흘러나오고
널찍한 베란다의 반을 차지한
동그란 위성 안테나는 리차가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그리스의
하늘을 향하고 있었죠
제법 길었던 한 챕터를 끝내니
어느새, 휴게소입니다.
뜨거운 커피를 한잔 마셔야겠어요
하늘은 흐리지만 다행스럽게도
비가 올 것 같지는 않네요.
뭐.. 비가 와도 그만입니다.
비 오는 바다도 참으로 오랜만이니까요.
<남은생 잘 먹겠습니다>
아네고에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