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갇힌 시간
회사와 인과 연을 완전히 끊었다는 내 소식을 들은 절친이, 그간의 노고를 위로하며 선물을 보냈다. 사방을 투명한 테이프에 꽁꽁 묵힌 상자를, 날카로운 칼로 결 따라 조심스럽게 긋고 두근두근 날개를 펼치듯 활짝 연다. 블루투스 기능도 있는 화장품 파우치보다 조금 큰 흰색의 제네바 라디오다. 함께 동봉된 손편지에는 '이제 집구석에서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질 터이니 가끔 사람 소리가 그리워질 때 이 라디오를 켜라. 그리고 틈틈이 또 하나의 친구라고 생각하고 짧은 대화도 하고 세상사는 소리도 들어라.'라고 검정 볼펜으로 또박또박 쓰여있다. 나는 푸~하고 웃음이 터졌다. 친구는 어떻게 알았을까? 센스가 보통이 아닌 건 이미 알고 있지만 이 정도 일 줄이야... 정확히 그랬다. 회사를 떠난 후 하루 종일 집에서 보내는 날이 많았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창밖이 어두워지고 아침이 밝았다. 누군가를 막힘없는 말들로 설득하고 납득할만한 이유를 달아 또 설명하고 결국, 상대방이 고개를 끄덕여야 마무리 되는 일로 오랫동안 월급을 받아온 나에게는 이 침묵의 날들은 낯설고 놀라운 일이다. 처음엔 소리라고 내가 만드는 기척이 전부인 게 너무 삭막해서 티브를 하루 종일 틀어놓았다. 채널이 100개가 넘어도 과거를 반복하는 한낮의 티브는 볼거리가 못된다. 게다가 틈만 나면 속사포 처럼 쏘아대는 보험광고와 대출광고는 조용한 극장 안에서 눈치 없이 떠들어대는 시끄러운 아이들의 소음보다 더 짜증이 났다. 딱 삼일 만에 나의 티브이는 다시 눈을 감고 침묵했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간간히 지인들이 던져주는 일감들을 해치우는 나의 공간은 싸늘한 적막이 흐른다. 그러다 문뜩 내가 이곳에 혼자 갇힌 듯한 착각이 든다. 얼른 노트북을 펼치고 애플의 이름으로 골라준 오늘의 뮤직을 클릭한다. 제법 내 취향을 저격한 기특한 곡들이 몇 개 흐르다 최신가요로 갈아타기 시작한다. 잠시 떠드는 것을 중단했던 극장 속 시끄러운 아이들이 또 입을 연다. 나는 노트북을 신경질적으로 접고 혼자 갇힌 듯한 나의 시간을 위해 침묵을 선택한다.
이제, 친구가 보내준 라디오 덕에 나는 새로운 친구가 생긴 샘이다. 눈을 뜨면 이제 일어날 시간이라고 잠을 깨우듯이 라디오 버튼을 툭하고 누르고 맞춰놓은 클래식 채널에서 흐르는 음악에 맞춰 커피를 내린다. 그리고 오홋.. 오늘 아침은 선곡이 좋은데?라고 말을 건넨다. 기다렸다는 듯이 디제이의 장단이 이어지고 커피잔을 꼭 쥔 나에게 기분 좋은 허밍을 선사한다. 그래. 라디오 친구.... 우리 오늘부터 1일이다. 잘 사귀어 보자.
해결책 : 라디오와 자신만의 대화법 찾기 ( 아침에는 클래식이나 영화음악을 들으며 가벼운 대화. 점심에는 긴 수다를 위해서는 최신가요. 짧은 수다에는 추억의 팝이나 가요. 저녁에는 누구누구의 음악캠프나 누구누구의 산책을 들으며 오늘의 일과를 정리해본다 )
아네고 에미
(매주 수요일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