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생은 일하지 않습니다 12

평일 낮의 공포

by anego e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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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 가기 위해 일부러 흐린 날을 골랐다. 아직도 평일의 대낮에, 거리에 서있는 내가 낯설기 때문이다. 모두가 각자의 공간으로 안기는 시간 나만이 길거리에 덩그러니 버려진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런 나를 야속한 햇살은 눈부시게 환한 빛으로 무대 위의 조명이 되어 만인 앞에 선명하게 비춰낸다. 나는 숨을 곳이 없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힐끔 거림에 괜스레 주눅이 든다. 고개를 숙이고 나도 모르게 부지런히 걸음을 옮긴다. 억울하게도 아직도 나의 시간은 회사의 시간에 붙잡혀 막 서울로 전학 온 시골학생처럼 달라진 상황 앞에 멍청이처럼 주눅 들어 있다. 제발 이제 정신 좀 차리고 속 시원하게 떨쳐버리고 나오라고 수없이 다그쳐도 여전히 딱딱히 굳은 채 그저 허우적 될 뿐이다. 그렇다. 시간에게도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누구의 잘못도 누구의 탓도 아니다.


평일의 서점.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책을 핑계로 이곳을 방황하고 있다. 설렁설렁 걸음을 옮기며 틈틈이 뒤적이는 책들은 그저 이곳에 어울리는 아주 적절한 추임새일 뿐이다. 그들의 눈은 책을 향하지만 마음은 딴 곳에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의 나처럼. 베스트셀러로 선택된 영광의 책들이 입구의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진열되어 있다. 순간 책들도 우등생과 열등생이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서글퍼졌다. 이 세상은 이렇게 어떤 식으로든 이쪽과 저쪽의 선을 긋고 순서를 매기고 등급을 나눈다. 일등을 한 책을 뽑아 들고 첫 장을 펼친다. 그러다 갑자기 나마저 이 우월한 책들을 더 건방지게 만드는 것 같아 다시 냉큼 제자리로 돌려놓는다. 이렇게 삐딱한 중2 같은 마음이 충만할 땐 책 보다 잡지가 답이다. 얄밉게도 태어난 지 한 달이 지난 잡지만이 자신의 속내를 허락한다. 이달에 태어난 아이들은 반뜻반뜻한 비닐에 꼭꼭 싸여 호기심이라는 베일 속에 감춰져 있다. 한참을 서서 지날 달의 잡지를 뒤적이고 맘에 드는 여행지의 기사도 빠른 속도로 읽는다. 서서히 나도 모르게 오전 내내 바스락 되던 쓸모없는 잡생각들은 사라지고 잠시 글 속에 빠져든다. 언젠가 그곳에 가고 싶어 졌다. 그곳에 가면 이런 글들이 쓰고 싶어질만큼 시간들은 나를 위해 자유롭게 훨훨 날아줄까? 실컷 뒤진 잡지는 다시 내려두고 비닐에 싸인 이달의 잡지를 집어 들고 계산대로 가 카드를 내민다. 잡지를 겨드랑이 사이에 꼭 끼고 잔뜩 흐린 거리를 투벅투벅 걷는다. 곧 비가 올 것 같다. 얼른 집으로 돌아가서 커피를 내리고 따끈따근한 이 아이를 아주 여유롭게 차근차근 읽어주리라. 기분이 갑자기 좋아졌다. 이렇게 점점 단순해지는 나를 나는 아주 진심으로 응원한다. 막 횡단보도를 건너려는 순간, 누군가 내 팔을 잡는다. 고개를 돌리자 검정 정장을 단정하게 입은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다. 무슨 일이라는 듯 눈을 깜빡이는 나에게 그녀는 말한다. " 인상이 참 좋으세요. 좋은 기운이 흐르시네요." 아하... 갑자기 짜증이 난다. 애써 재워놓은 아기를 누군가 실수로 깨워 다시 울어대는 것처럼 짜증이 몰아친다. 제발... 오늘만은 나에게 당신은 이런 말을 걸지 말았어야 했다. 그런 말로 내 기분을 망치지 말았어야 했다. 나는 그녀의 손을 내 팔목에서 차분하게 떼어놓고 거칠게 횡단보도를 건너간다. 진정 평일 낮의 공포란 그 절정이란 이런 것이라는 생각을 깊숙하게 하면서...



<해결책> 서점보다 동네 구민 도서관을 간다. 평일의 이곳은 세상 조용하고 사람도 별로 없다. ( 동네라 길거리에서 도를 운운하는 그분들을 만날 확률도 제로다.) 천천히 책들을 고르고 읽어보다가 괜찮으며 대여한다.(책값도 세이브) 아울러, 도서관 구내식당에서 맛보는 학창 시절 추억 돋는 4000원 돈가스는 덤이다.



아네고 에미

< 매주 수요일 연재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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