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도망가자
늦은 아침, 커피 한주전자를 내려놓고 습관처럼 라디오를 켠다. 별다른 스케줄이 없는 보통의 하루이지만 언제나 내 맘 같지 않은 깝깝한 머릿속은 여전히 오늘도 부지런히 돌기 위해 서서히 시동을 건다. 지난 주말의 끝자락, 적당히 심심해진 내가 연거푸 하품을 시작하던 그 절묘한 타이밍에, 3년째 자신의 회사를 그럭저럭 잘 운영하고 있는 나보다 십만 배쯤 잘 살고 있는 후배로부터 전화가 왔다. 엄청나게 급하고 무지하게 복잡한 그리고 심지어 애매하기까지 한 골치 아픈 일을 제발 처리해 달라는 것이다. 부디 '예스'라고 대답해달라는 그녀의 다급한 목소리를 뒤로하고 잠시 고민에 빠진 나는, 더 나이 들기 전에 꼭 한 번은 가고 싶은 스페인 여행을 떠올리며, 그 경비 마련을 위해서라는 달콤한 명분을, 슬슬 '귀찮음'이라는 방해꾼을 깨우기 시작하는 스스로에게 강하게 주지시키며, 담담하게 예스라고 답하고 말았다. 커피를 홀짝이며 그녀가 메일로 첨부해온 자료를 읽어 내려가는 그때, 십년지기 후배에게 전화가 왔다. 언제나 유쾌하고 호탕하던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다. 무슨 일 있는 거냐는 나의 질문에, 그 녀석은 다짜고짜 사는 게 너무 힘이 들고 너무 우울하고 토 나오도록 버티기 힘든 데 도대체 답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 할 곳이 선배밖에 없어서 무작정 회사를 뛰쳐나와 전화를 했다며, 곁에 있었으면 내 두 손이라고 부여잡고 엉엉 울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까? 솔직히 이 정도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을 만큼 우울한 마음이 드는 순간이면 술도 사람도 여행도 아무것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저 아주 짧은 순간의 도피일 뿐 결국 혼자 남겨진 밤의 막막한 시간이 오면 더욱 허망하고 깊은 절망 속으로 빠지고 마니까. 나는 그의 거친 숨이 진정되길 잠깐 기다린 후에 차분하게 말했다. " 나라면 책으로 도망갈 거야. 이 전화를 끊으면 무조건 서점으로 가. 그리고 네 눈에 들어온 책 몇 권을 사는 거야. 그리고 근처의 아무 버스나 타. 종점까지 가면서 골라온 책들을 닥치는 대로 독식하는 거야. 실연당하고 꾸역꾸역 입속으로 밀어 넣은 양푼 가득한 비빔밥처럼, 책 속의 활자들을 너의 머릿속에 너의 마음속에 터지도록 자꾸자꾸 밀어 넣는 거야. 그 글들이 너에게 어떤 의미인지는 고민할 필요는 없어. 그냥 읽어버리는 거야. 그러다 보면 어떤 한 구절에 자신도 모르게 네가 집중하게 되고 어떤 한 구절에 꼼짝도 하지 않던 네 마음이 조금씩 움직이고 어떤 한 구절에 다시는 낼 수 없었을 같았던 용기가 생길지도 몰라.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는 법을 찾아내는 거야. 정말로 힘이 들 땐 세상 모든 것들이 다 나보다 멀쩡해 보여서 나를 더 초라하게 하거든. 그럴 땐 책으로 도망가는 거야." 후배의 훌쩍이는 목소리를 진정시키며 전화를 끊고 방한 구석에 쌓아놓은 나의 책들에게 살가운 눈길을 준다. 그래. 책만 하게 없다. 그저 손가는 책 한 권으로 오늘 하루도 고생한 나의 복잡한 머리와 하루하루를 힘들게 버티는 내 지인들을 위해 멋지게 "치어스"라고 외쳐주면 그만이다. 나도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는 가끔은 그들의 아픈 곳을 가만히 토닥여주는, 구차하지만 조금이라도 힘. 용기 따위를 줄 수 있는 책 한 권 쓰고 이 생을 마감하면 소원이 없겠는데 말이다. 사랑하는 나의 책들아 , 나에게 너희들의 기운을 팍팍 전수해다오.
< 해결책 > 미치도록 우울해지는 날에는 그동안 망설였던 책-만화책 포함- 무조건 사기.( 솔직히 술값보다 싼 가격 아닌가? ) 잘 안 타봤던 시내버스를 타고 맨 뒷자리에 앉아 종점까지 가면서 천천히 책 읽기. (가끔 창밖도 보고 버스에 탄 사람들의 얼굴도 보고) 결국 사는 건 다 비슷하다는 걸 깨닫는 순간 버스에서 내리기.
아네고 에미
<매주 수요일 연재됩니다>
구독자님들.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 언제나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