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하지 않은 날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날은 없다. 그저 세상 밖으로 내가 오늘 무엇을 했는지 들키고 싶지 않은 날이 있을 뿐... 점점 매서워지는 날씨와 외출을 위해 겹겹이 껴입어야 하는 뚱뚱한 옷차림이 귀찮아지는 한겨울이면, 나는 자발적 고립에 가까운 칩거에 들어간다. 그러다 아무런 흔적 없이 일주일이 지나가고 어느덧 이주가 넘어가는 시점에서 지인들은 생사의 안부를 독촉하는 메시지를 핸드폰의 작은 창으로 보내기 시작한다. 아무것도 안 하면서 도대체 집구석에서 꼼짝않고 어떻게 버티는 거냐고. 글쎄다. 나의 하루를 뭐라고 알려줘야 할까? 딱히 생산적인 활동으로 하루를 꽉 채우지는 못하지만 나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날은 없었다. 눈을 뜨면 가지런히 이불을 정리하고 커피를 내리고 청소를 하고 샤워를 하고 긴 머리카락을 정성껏 말린다. 커피를 홀짝이며 노트북을 열고 잔뜩 터질듯하게 채워진 메일박스를 대충 훑은 후, 어원부터 정리한 워드 파워의 영어단어를 몇 개쯤 외우고, 몇 페이지의 책장을 넘기고, 스케치북을 꺼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희미한 이미지들을 끄적인다. 이 아무것도 아닌 일을 하다 보면 2시를 훌쩍 넘기고 적당히 고픈 배를 안고 나는 잠시 고민에 빠진다. 집에서 늦은 점심을 먹을 것인가 아니면 며칠 전부터 당기던 매운 면요리를 시킬 것인가. 한 손에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며 냉장고를 열어보니 어머니의 손맛으로 만들었다는 즉석국, 새우가 푸짐하게 그려진 냉동 볶음밥, 진짜 말라 가는 마른반찬 등이 눈에 들어온다. 그래 오늘은 이걸로 때우자. 밉지 않게 차린 소박한 밥상을 앞에 놓고 라디오를 볼륨을 높이고 네이버가 알려주는 세상의 뉴스를 클릭하며 천천히 밥을 먹는다. 건더기가 조금 아쉬운 즉석국의 국물 맛은 나쁘지 않았고 새우가 씹히는 볶음밥은 딱딱한 마른반찬과 나름의 조화를 이뤄냈다.
어제 그리다 만 화판을 꺼내고 가지런히 그림도구를 펼쳐놓고 정성껏 색깔을 입히다 허리를 펴고 창밖을 보면 벌써 어두워진 지 오래다. 또 이렇게 하루가 저물어 가는 중이다. 나는 딱히 무엇을 위해 그림을 그리는 것도 아니며 그림을 그리는 데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눈에 들어온 사진이든 풍경이든 어떤 이미지든 그림이라는 나만의 세계 속으로 슬쩍 초대해 같이 놀고 싶은 것뿐이다.
사람들은 누군가의 칭찬과 사랑과 꿈으로 살아가는 힘을 얻는다고 했다. 나도 그랬다. 누군가에게 인정받기 위해 잘 알지도 못하는 그 누군가에게 멋지게 보이기 위해 버티고 애쓰고 울고 웃고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잘 모르겠다. 그렇게 살 자신도 그렇게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겠다. 그래서 난 오늘도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 같은 나만의 하루를 산다. 그리고 별들이 희미하게 수 놓인 까만 밤하늘을 보며 혼자 빙긋이 웃는다. 언젠가 다시 세상 밖으로 나를 보여주고 싶어 지는 그 날이 올 때까지 지금은 그저 세상 사람들에게 모두 비밀로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듯 보이는 나의 하루를 나만의 그 무엇으로 채워가자고.
< 해결책 > 일주일에 하루,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날을 스스로 정하고 결과를 강요하기에 애매한 것들을- 끝내기 어려운 손뜨개질, 해외에서 먹힐 외국어 몇 마디 외우기, 하다가 말 복잡한 색칠공부, 두꺼운 책들의 프롤로그만 읽기 등- 산만하게 하면서 보내 보기. 뜻밖의 관심과 재능을 발견하게 되는 부작용에 주의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