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잊어버리기
생각해보면 난 학창 시절 그렇게 암기력이 뛰어나지 못했다. 교과서에 색색의 현광 펜으로 밑줄을 그어가며 무조건 외우던 세대였음에도 불구하고 난 소위 '암기과목'이라고 부르는 과목들이 무척이나 싫었다. 시험 전날 대충 교과서를 소리 내어 두 번쯤 읽고 내가 좋아하는 번호를 찍었다. 그러다가 문과대학에 들에 들어간 덕분에 다양한 문학작품을 꾸역꾸역 읽다가, 나도 모르게 마음에 꽂힌 문장들을 노트에 받아 적고 외우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대학 졸업 후 카피라이터라는 직업군에 뛰어들면서 나의 이 문장을 향한 습관은 집착에 가까워졌고, 어느새 드라마를 보든 영화를 보든 놀라운 암기력을 자랑하며 긴 대사들을 줄줄 기억해냈다. 지금도 방 한구석에 차곡히 쌓인 노트들은 나의 문장과 단어들에 향한 뜨거웠던 노력의 흔적들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무언가를 기억하는 것보다 잊는 것이 더 어렵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기억나지 않는 건 낡은 노트를 뒤적이든 누군가를 괴롭히든 어떻게든 기억해 낼 수 있는데 잊는 것은 아무리 노력해도 쉽지가 않았다. 지독하게 잊으려고 애를 쓸수록 더 또렷하고 선명해져서 잊히지 않았다.
'새로운 도전을 위해서는 과거를 잊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했다. 그 과거가 화려했던 초라했던 눈부셨던 아팠던 모든 사연들을 말끔히 털어내지 않으면, 언제나 새로운 시작은 한순간에 그것으로 인해 발목을 잡히게 되고 또 주저앉게 된다. 달라져버린 현실이 도대체 자신의 마음에 차지 않아서 괴로워하는 선후배들에게, 난 그저 담담하게 한마디를 건넨다. 과거는 잊고 지금을 묵묵히 받아들이라고. 그러다 보면 차츰차츰 마음도 편해질 것이며, 어느새 내 앞에 놓인 별 대단하게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새로운 기회로 느껴지는 순간이 올 것이고, 그때야 말로 과거 따위는 영영 잊히는 거라고. 그것이 참 어렵다. 모두 어렵다고 말한다. 나 또한 어렵다. 누구에게도 속 시원히 털어놓지 못한 나의 화양연화 시절의 이야기가 있었고, 그 이야기는 나를 언제나 아프게 했고, 지긋지긋하게도 잊어버릴만하면 또 기억이 났다. 그 기억들이 지금의 나를 자꾸 초라하게 만들고 숨게 만들었다. 그러나 난,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예전보다 열심히 살지도 도전적이지도 젊지도 아름답지도 않지만, 난 날마다 천천히 흐르는 시간 속에서 나를 위해 사색하고 성장하는 법을 찾고 있다. 그렇게 발견한 긍정의 에너지를 주위 사람들에게 그전에 한 번도 진심이지 못했던 '미소와 관심'을 건내며, 나의 존재를 다시 떠올리게 하고 싶다.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은 지금의 나를 나는 가만히 안아줄 것이다. 먹먹해지는 기억들은 기억조차 하지 않도록 스스로에게 주문을 건다. 오늘처럼 햇살이 눈부신 날, 별 약속이 없어도 살얼음이 소복이 덥힌 샤도네이 병을 꺼내고 그리다 만 그림을 그리며 혼자 웃을 것이다.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행복한 해결책을 나는 찾았고 그 또한 나의 선택이니까. 그 순간 벨이 울리고 작업실의 막내가 사과 한 박스를 보냈다. 그 녀석의 고마운 마음을 떠올리며 사과를 한입 베어 문다. 이 훈훈한 맛은 영원히 기억하는 걸로.
<해결책> 하루하루 나이드는 걸 감사하기. 나이들면 기억력도 떨어지니까.
아네고 에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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