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그렇게 살지 몰랐어'
" 네가 그렇게 살지 몰랐어." 강산이 한번 변하고 그리고 또 몇 년이 넉넉히 흐른 후, 아주 오랜만에 만난 그녀가 나에게 건네 첫마디였다. 정든 광화문을 떠나 새롭게 둥지를 튼 곳의 제법 긴 전철역 에스 켤레터에서 여전히 동그란 바가지 모양의 커트머리를 하고 호기심으로 가득한 눈을 반짝이는 그녀와 마두 쳤다. 얻갈리기가 일쑤였던 그 옛날처럼, 그녀와 나는 상행선과 하행선을 나눠 타고 '어'하는 반가움과 어색함이 적당히 교차된 감탄사를 쏟아내며 하행선의 그녀가 아래도 내려오라는 요란스런 손짓을 나에게 보냈다.
그녀는 큰 아들이 벌써 대학생이라는.... 그것도 서울대 생이라는 이야기로 그녀가 이미 적지 않은 나이라는 것과 그간 쏜살 같이 흘러버린 세월의 흐름을 대신하고, 말할 때 마다 가는 주름이 세겨지는 눈으로 나를 아래위로 은근슬쩍 훑으며 최근에 만난 지인에게 나의 안부를 들었다며 환하게 웃었다. " 네가 그렇게 살지 몰랐어. 난 정말 네가 쭉 광고회사에서 뼈를 묻으며 큰 일이라도 낼 줄 알았어. 네가 좀 당차고 자신감과 열정이 넘쳤니? 그런 네가 회사를 그만두고 그림 공부를 하고 이제부터는 글 쓴다며? " 그녀의 의구심 가득한 폭풍 수다를 잔잔한 심호흡과 알듯 말듯한 미소로 받아내며 나는 그녀보다 한톤 낮은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 그러게요... 나도 내가 이렇게 살지는 몰랐어요. "
그녀와의 10분도 채 되지 않았던 짧은 조우는 많은 생각들로 내 머릿속을 어지럽히기 시작했다. 그저 그녀가 별 뜻 없이 한 '네가 그렇게 살지 몰랐다'는 그 한마디가 자꾸 환청처럼 귓가를 맴돌며 세상이 나를 조롱하는 기분이 들기도 하다가 누군가의 부러움이 담긴 응원의 메시지로 들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작은 한숨을 토해내고 말았다. 이 한숨의 의미는 좌절이나 절망이 아니다. 그녀의 말처럼' 그렇게 살기'로 한 나를 위한 걱정이자 위로였다. 그렇게 하기로 한 것은 분명 나의 선택이었으니까. 그녀가 기억하는 당차고 자신감 넘치는 나는 이미 사라졌고, 소심하지만 침착하고 느리지만 실수하지도 아프고 싶지 않은 오늘의 내가 그렇게 살아가고 있으니까.
< 해결책 > 말하기보다 듣는 법을 배우기. 곱게 늙기의 기본기는 잘 듣기라는 사실. 누군가에게 전화가 오거나 걸 경우'그래, 너는... 아하.' 이 세 마디를 반복하며 상대방의 이야기를 끌어내며 잘 들어보기. 세상의 모든 정답은 누군가의 이야기 속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그녀도 이제는 알아야 할텐데...
아네고 에미
< 매주 수요일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