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해는 봄비를 타고

녹두 빈대떡

by anego emi
4.빈대떡.jpg


불가 용어에 시절 인연이라는 말이 있다. 모든 인연은 오고 가는 시절이 있다. 굳이 애쓰지 않아도 만나야 할 인연은 만나게 되어있고... 아무리 애를 써도 만나지 못할 인연은 만나지 못한다고 했다. 그저 또 스쳐지나가는 것이다.


오랜 지인이 있었다. 나와 사는 방식도 스타일도 다르고 또 달랐지만 난 그녀의 씩씩한 미소와 오롯한 성실함이 좋았다. 그런 그녀와 많은 계절을 함께 보냈고 어느덧 강산이 변하고도 남을 나이 든 인연이 되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오랜만에 둘이 떠난 해외여행이었다. 서로가 너무나 편하고 익숙한 탓인지, 늘 그랬듯이 말하지 않아도 눈빛과 표정만으로 내 마음을 읽어주길 바라며 상대에게 많은 걸 기대하고 의지한 덕분에, 조금씩 마음속에 서운함을 쌓아갔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었으면 그동안의 사회생활로 다져진 ‘타인을 향한 배려’라는 이름으로 꾹 참았을 불편함과 짜증을 순간 거침없이 뱉어내고 말았고, 나는 엄마에게 속없이 쏘아붙인 날처럼 가슴 먹먹한 후회를 했다. 그러다가 ‘나만 그런 것도 아닌데 왜 나만 이렇게 미안해야 하는가’하는 심술이 서서히 부풀어 올랐고, 결국 마지막 날 밤 잔뜩 구긴 얼굴로 아무런 말이 없는 그녀를 호텔 방에 남겨둔 채 거칠게 문을 닫고 나오면서, 치명적인 마음의 상처를 그녀에게 남기고 말았다.


그리고 아무런 연락 없이 몇 달이 훌쩍 흘렀다. 문뜩문뜩 그녀와 보냈던 시간을 다시 꺼내보면, 그녀가 나에게 건네준 봄날의 꽃 같은 살가운 행동과 따뜻했던 말들을 떠올리면, 그녀와의 인연을 이렇게 끝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처럼 보슬보슬 내리는 봄비 속을 천천히 걸어가면서, 나는 그녀와 함께 보낸 수많은 봄과 산책길이 가슴 시리도록 그리워졌고, 어느새 그녀와 자주 갔던 시장 골목 앞에 서 있었다. 소박한 먹거리를 좋아하는 그녀는 이렇게 비 오는 날이면 녹두빈대떡에 막걸리를 마셔야 한다고 나를 졸랐다. 촉촉한 봄날의 운치를 더하는 안개 같은 봄비 탓인지 빈대떡 가게는 아직 해가 지지 않았는데도 벌써 북적거렸다. 삐죽이 열린 가게 문틈으로 고소한 녹두빈대떡 굽는 냄새가 새어 나왔고, 난 또 그녀가 보고 싶어 졌다. 용기를 내 문을 열고 구석자리에 앉아 녹두빈대떡과 막걸리를 주문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문자를 보냈다.‘오늘은 꼭 너를 보고 싶다. 이 봄비와 함께 너와 화해를 하고, 우리의 인연을 새롭게 시작하고 싶다.’ 핸드폰의 까만 창을 기약 없는 연인을 기다리는 듯 쓸쓸한 눈으로 바라보며 내 앞에 놓인 막걸리를 반이나 비웠지만 답장도 그녀도 오지 않았다.

나는 어둑어둑 해진 창 밖의 점점 굵어지는 빗줄기를 멍하니 보며 정말 이제 그녀를 놓아줘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뜨끔뜨끔 마음이 아파왔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몽글몽글 두 눈가에 맺히며 시야가 흐릿해지는 그때, 하얗고 고운 손이 나의 빈 잔에 남은 막걸리를 따랐다. 그녀였다. 비 때문에 차가 막혀 빨리 올 수가 없었다고 했다. 나의 두 눈은 더욱더 뜨거워졌고 가는 빗줄기 같은 눈물을 주르륵 쏟아냈다. 이 봄비와 함께 우리는 화해를 했다. 그녀를 기다리며 이미 식어버린 녹두빈대떡 한 조각을 그녀의 접시에 올려주고 그제야 나는 환하게 웃었다. 그녀와의 인연을 이어 준 봄비 오는 날의 녹두빈대떡 – 다시는 놓치고 싶지 않은 그녀와 함께 조금 더 맛있게 먹을 걸 그랬다.


아네고 에미


이전 05화함께라면 식은 죽 먹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