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 삼합
지독히도 더웠던 올여름의 끝에선 어느덧 아침저녁 감쪽같이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었다. 일요일 오후 청소를 끝내고 밀린 빨래도 돌리고 여유롭게 커피 한잔을 내렸다. 그리고 오랜만에 라디오를 켰다. 왠지 차분하게 스며든, 이런 녹녹한 일상의 평화로움에는 라디오가 어울릴 것 같았다. 라디오에서는‘버스커버스커’의‘여수 밤바다’가 흘렀다. 초가을의 햇살이 적당히 내리쬐는 창가에 기대어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다 ‘여수 밤바다’라는 소절이 반복되는 대목에서 나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밤바다’만으로 추억 속 한 장면이 가물가물 떠오르지만,‘여수’가 더해진 ‘밤바다’는... 가만히 입으로 웅얼거리는 것만으로‘낭만’이라는 까맣게 잊혔던 단어마저 떠올리게 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라디오의 볼륨을 높였다.
그리고 며칠 후, 나의 애절하고 다소 장엄하기까지 한 – 쓸쓸한 독거노인으로 메말라 가는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낭만이라는 – 스토리텔링에 홀랑 넘어간 마음 여린 코스모스 같은 여인들을 모아 여수행 기차표를 샀다. 가늘게 펼쳐놓은 솜사탕 같은 구름이 덮인 여수의 가을 하늘은 작은 탄성이 나올 만큼 아름다웠고 파도를 잠재운 여수의 바닷바람은 덥지도 차지도 않았다. 수학여행을 온 여고생 마냥 들뜨고 설레는 마음을 웃음 섞인 수다로 쏟아내며, 붉게 물드는 바다를 가로질러 둥둥 떠 내려가는 커다란 풍선 같은 케이블카를 타고, 노래 속 배경이 되었다는 낭만 포차의 거리로 향했다. 하나 둘 어둠을 밝히며 오픈을 알리는 포차들의 행렬이 양 날개를 펼치기 시작하자 사람들이 모여들며 밤바다를 둘러싼 주변의 열기는 덩달아 뜨거워질 준비를 했다. 어느덧 우리들 마음속 깊숙이 묻혔던 낭만 세포들이 조금씩 꿈틀거리며 살아나 딱딱하게 굳은 우리들의 심장을 두근두근 간지럽히고, 주변을 두리번대며 별다른 이유도 없이 모두를 피식피식 자꾸 웃게 했다. 우리는 길게 늘어선 포차 앞을 어슬렁어슬렁 걸어가며 포차마다 메뉴가 제각기 다른 것에 감탄하며, 오늘의 낭만을 위한 메인 음식을 고르기 위해 부지런히 서로의 의견을 모았다. 여수행을 계획한 내가 맛집 블로거에서 본 적이 있는 ‘낭만 삼합’이 어떠냐고 물으며 인상 좋은 주인아저씨의 포차 앞에서 걸음을 멈췄고, 슬슬 배가 고파진 그녀들은 말없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희미한 별들이 듬성듬성 박힌 까만 밤하늘과 파도치는 소리가 간간히 메아리처럼 울리는 까만 바다가 정면으로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그 포차의 명물이라고 크게 써 붙여놓은 ‘낭만 삼합’을 시켰다.
손발들이 아직도 꿈틀 대는 싱싱한 낙지와 주꾸미를 선두로 얇은 삼겹살과 저민 닭다리살까지, 육해공의 대표들이 커다란 철판 위에서 매콤한 특제 양념 속을 뒹굴며 맛있는 전투를 벌였다. 서서히 숨을 죽이며 맛있게 익어가는 그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보자 입안 가득 금세 침이 고였다. 무조건 첫 잔은 ‘소맥’인 그녀가 괜스레 신이 나서 모두에게 건 낸 소주가 맥주가 썩인 잔을 우리는 기다렸다는 듯이 단숨에 비워내며 ‘캬’하고 합창을 했다.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도톰한 낙지 한 토막과 삼겹살을 깻잎에 싸서 얼른 입안으로 넣었다. 주인아주머니가 감칠맛 나게 익은 아삭한 갓김치를 내어 주시며 갓김치에 싸 먹어도 그만이라고 하셨다. 적당히 취기가 오른 우리는‘감사합니다’라고 말 잘 듣는 학생들처럼 소리 높여 외치고 주인아주머니의 말대로 갓김치에 싸서 크게 한입 먹었다. 갓김치의 쌉쌀한 향이 매콤함 맛과 묘하게 어우러져 전혀 새로운 맛이 났다.
어디선가 여수 밤바다라는 무대 위에서 부르는 누군가의‘여수 밤바다’가 기타 소리와 함께 라이브로 울려 퍼졌다. 낭만이란 아마도 익숙한 기억 속의 풍경을 다시 들춰내며 그때도 지금도 함께 한 사람을 영원히 그리워하는 마음이 아닐까? 어느새 여수의 밤바다에서 낭만을 되찾고 볼그레해진 우리들이 아무리 먹어도 줄지 않았던 ‘낭만 삼합’ – 소화제를 사 먹을지언정 끝까지 조금 더 맛있게 먹을 걸 그랬다.
<아네고 에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