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대찌개
계란 물을 입혀 노릇노릇 부친 동그란 분홍 소시지. 칼집을 내 튀기 듯 구운 줄줄이 비엔나소시지. 꼬불꼬불 케첩이 뿌려진 기다란 후랑크 소시지. 학창 시절 우리들의 도시락 반찬을 책임지던 무적의 삼총사들이었다.
나는 그중에 하나라도 어쩌다 식탁 위의 반찬으로 만나게 되면, 반가운 마음에 제일 먼저 손이 갔다. 맛있는 것들이 차고 넘치는 요즘이지만 가끔은 그 시절 도시락 속 소시지 반찬들이 그립다. 이 추억의 삼총사들을 총집합시켜 어른의 입맛으로 얼큰하게 둔갑시킨 것이 바로, 부대찌개가 아닐까?
자주는 아니지만 왠지 중독성이 강한 이 음식은 한 달에 한 번쯤은 뜬금없이 생각이 났다. 딱히 밥 생각도 없고 입맛도 없는 휴일 오후, 설렁설렁 집안 청소를 끝내고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귀를 간지럽히는 그때, 내 머릿속에서 넙적한 냄비에 담긴 부대찌개가 세탁기 소리에 맞춰 보글보글 끓으며 맴돌기 시작했다. 나는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 나처럼 끼니를 잊은 채 남은 휴일을 뒹굴 거리는 허기진 동네 지인들을 찾아냈다.
잠시 후 우리는 근처 부대찌개 집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콩나물과 양배추가 봉오리처럼 쌓인 부대찌개가 어서 끓어오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봉오리 속에 숨겨진 소시지들을 젓가락으로 슬쩍슬쩍 뒤적이며 반가운 미소를 보냈다. 반으로 뚝 잘린 채 국물 속에 잠겨있던 라면이 보글보글 끓는 소리와 함께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고 우리들의 젓가락질은 바빠졌다. 밥과 함께 사람 수만큼 덤으로 나오는 계란 프라이는 그저 감격의 작은 환호성이었다.
나는 뜨거운 밥에 부대찌개 한 국자를 떠 넣고 노른자가 흘러내리는 계란 프라이를 쓱쓱 비벼 먹으며 환한 웃음을 지었다. 요즘 도통 입맛이 없다며 투덜대던 그녀는 이미 꼬들꼬들 잘 익은 라면을 후루룩 후루룩 폭풍 흡입 중이었고, 소시지 따위는 애들이나 먹는 거라며 자신은 그저 맛만 보겠다던 그는 이미 두 그릇째 소시지만 골라 먹고 있었다. 송골송골 이마에 맺힌 땀과 발갛게 상기된 얼굴에서 오늘의 메뉴가 주는 만족감과 즐거움이 여지없이 묻어났다. 슬슬 바닥을 보이는 부대찌개를 바라보며 우리들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육수를 더 부어 라면과 소시지를 리필할까? 아니면 남은 국물에 김가루를 솔솔 뿌려 밥을 볶을까? 그러나 어느 것을 욕심내기에도 여전히 두툼한 우리들의 뱃살과 다가오는 여름이 신경이 쓰였다.
결국, 우리는 남은 밥과 찌개를 싹싹 깨끗이 비워내고 아쉬움을 남긴 채 식당을 나왔다. 차가운 아메리카노 한잔을 들고 골목길을 어슬렁어슬렁 걸었다. 나는 오늘따라 더 씁쓸한 커피 한 모금을 삼키며 입안에 남은 부대찌개의 여운을 지워내려 애썼다. 자주도 아닌 어쩌다 먹는 부대찌개 – 어차피 줄지도 않는 뱃살 따위는 까맣게 잊은 채 조금 더 맛있게 먹을 걸 그랬다.
아네고 에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