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개찜
‘인연이라는 것’은 아마도 우리가 영원히 풀 수 없는 세상에서 아름다운 수수께끼 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녀를 만난 건 뉴욕 여행의 마지막 날이었다.
깜짝 선물처럼 미국으로 날라 온 나를 그냥 보내기 아쉬웠던 대학 동창들은 그들이 사는 LA로 나를 초대했다. 그 덕에 예상보다 일정은 늘어났고 한 달간 빌린 스튜디오가 만기 된 나는 어쩔 수 없이 한인 민박집에서 이틀 밤을 보내야 했다. 마음의 각오는 했지만 민박집은 사진보다 훨씬 좁고 실망스러웠다.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숙소인 나는 한숨이 절로 나왔지만 ‘이틀이니까’하고 꾹 참아 보기로 했다.
침대도 아니고 각자의 이불과 요를 깔고 나면 꽉 차는 방을 세 사람이 나눠 쓰고 있었다. 실망을 넘어 좌절한 눈빛을 하고 트렁크에서 당장 갈아입을 옷을 꺼내는 나에게, 얇은 커튼 뚫고 햇살이 희미하게 비치는 창가에 자리를 튼 그녀가 먼저 말을 걸었다. “생각보다 너무 하죠? 그래도 있는 동안 재미있게 지내요.”하고 환하게 웃었다. 큼직한 하트가 그려진 하얀 티셔츠에 노란색 짧은 반바지를 입은 긴 생머리의 그녀는, 누가 봐도 20대의 싱그러운 에너지와 초여름을 닮은 풋풋한 기운이 느껴졌다.‘그때는 내가 예쁜 줄 알았는데 젊어서 예쁜 거였다.’ 하던 친구의 말을 순간 떠올리며,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그래요. 재밌게 잘 지내요. 내가 한참 언니인 것 같으니까, 편하게 언니라고 불러 줄래요?”
뮤지컬 공연을 좋아하는 그녀 덕분에 나는 무대가 내려다 보이는 값비싼 R석의 티켓을 운 좋게 저렴한 가격에 사고, 한껏 기분이 들떠 소나기가 내리는 맨해튼 거리를 신발이 젖은 줄도 모르고 그녀와 신나게 질주했다. 그리고 나는 그녀와 밤새도록 수북이 감자 칩을 쌓아놓고 맥주를 마시며 끝없는 수다를 떨었다. 그녀의 유쾌한 웃음소리가 긴 여행에서 바닥났던 나의 에너지를 조금씩 채워주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는 뉴욕 여행의 끝자락에 나에게 주어진 행운의 선물 같았다.
서울로 돌아온지 두 달이 지났고 나는 그녀를 광화문의 어느 카페에서 다시 만났다. 그때의 추억을 떠올리며 우리가 함께 한 짧았던 그 시간이 얼마나 즐거웠는지 서로에게 각인시키느라 목소리를 높이며 한참을 떠들었다. 그 후 일 년이 흘렀고 그녀는 원하던 회사로 재취업에 성공했고 그녀만의 보금자리를 구해 독립을 했다. 그리고 그녀와 나는 어느덧 이웃이 되어 한 동네에 살게 되었다. 토요일이면 같이 산책을 하고 점심을 먹기도 하고 약속 없는 허전한 금요일 저녁이면 우리 집에 모여 와인을 마셨다. 오늘은 그녀가 조개 찜을 먹자고 아침부터 나를 졸랐다. 사람들이 북적이는 시간을 피해 이른 저녁, 우리는 조개찜을 먹으러 갔다. 병풍을 같은 창문을 한쪽으로 걷어낸 가게 안에는 선선한 바람이 불었고 싱글벙글 넉살 좋은 주인아저씨가 넉넉하게 담아준 조개 찜을 앞에 놓고 우리는 환호성을 질렀다. 그녀는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냄비 속에서 알이 굵은 조갯살을 건져 내 입 속으로 넣어주었다. 놓칠 수 없는 사랑스러운 인연이 된 그녀와 함께 했던 조개 찜 – 그녀의 웃음소리를 수북하게 쌓아가며 조금 더 맛있게 먹을 걸 그랬다.
아네고 에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