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 칼국수
그날은 솔직히 어딘가에 정신이 홀린 것 같았다. 한 달 내내 준비한 프로젝트를 연차가 어리다는 이유로 옆 팀의 선임 선배에게 고스란히 넘겨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는 순간, 나는 미친 듯이 가방을 챙겨 들고 아직 퇴근시간이 한참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회사를 뛰쳐나왔다.
가방 속 핸드폰은 연신 울려댔고 나는 신경질적으로 전원을 끄고 택시를 잡아탔다.‘어디로 갈 거냐’는 듯 룸 미러 속의 두 눈이 나를 빤히 봤다. 순간 나는 갈 곳이 없었다. 아니 생각이 안 났다. 지금 같았으면 당장 서울역이든 인천공항이든 가 가장 빠른 기차나 비행기를 무조건 잡아타고 어디론가 훌쩍 떠났을지도 모르지만 그때는 여전히 겁 많고 어리고 그만한 배짱도 없었다.‘그래. 일단 집으로 가자. 그리고 이불이라도 뒤집어쓰자. ’어느덧 택시는 마포 대교를 지나 시내로 달리고 있었고 나는 조금씩 이성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좀 더 성숙하지 못한 나의 돌출 행동에 대한 이유와 명분을 찾아내기 위해 내 머릿속은 뒤죽박죽 복잡해졌다.
‘뭐 나라를 구하는 대단한 일도 아닌데, 나는 아직 기회가 많은데, 쿨 하게 웃으며 그까짓 일 넘기면 그만 일 텐데…’하는 후회가 밀려드는 순간,‘아니다. 그런 아니다. 그동안 내가 고생한 것이 얼만데. 이 프로젝트는 너에게 주는 엄청난 기회라고 큰 부담을 안길 때는 언제고, 이제와 말을 바꾸는 그들이 나쁜 거 아냐?’ 머릿속에서 각자 딴 소리를 하는 두 개의 내가 격렬하게 말다툼을 하기 시작했다. 도저히 그냥 집으로 갈 수 없었다. 나는 급히 택시를 세우고 무작정 내렸다. 그리고 반쯤 넋이 나간 흐리멍덩한 얼굴로 타박타박 발걸음을 앞으로 옮겼다. 하교 길 학생들의 웃음소리가 꿈속에서처럼 희미하게 윙윙 울렸고 그 누군가의 묵직한 어깨가 나를 거칠게 밀쳤다. 그 순간 몸을 휘청이며 고개를 급히 든 나에게‘똑바로 보고 다니라’하는 그 누군가의 시선이 따갑게 꽂혔다. 나는 죄송하다는 듯 몇 번의 목례를 하고 이제야 주위를 돌아봤다.‘도대체 여기는 어디인 걸까?’
그때 저 멀리에서 구수하고 진한 멸치육수 냄새가 났다. 그러고 보니 여기는 우리 집과 정반대 방향에 있는 재래시장으로 가는 길이었다. 나는 어딘가에 홀린 듯이 멸치육수 냄새를 따라 저녁 시장을 보기 위해 북적이는 사람들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시장 칼국수’라는 낡은 간판이 천장에 매달려 있고, 부지런히 국수를 삶아내는 주방을 둘러싼 기다란 벤치 의자에는, 사람들이 빼곡히 모여 앉아 칼국수를 맛있게 먹고 있었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보던 인상 좋은 주인아주머니와 눈이 마주친 나는 그녀가 눈으로 알려주는 자리로 비집고 들어가 앉았다. 갑자기 뱃속에서 꼬르륵하고 제법 큰 소리가 났다. 지금까지 샌드위치 한 조각이 전부였던 나의 뱃속은 맛있는 음식 앞에 내 기분과 상관없이 환호성을 터트리는 것 같았다.
방금 끓여낸 따끈한 칼국수 한 그릇이 내 앞에 놓였다. 살짝 데쳐 숨을 죽인 부추와 잘게 썬 양파, 애호박이 고명으로 올려지고 그 위에 양념장이 뿌려져 있었다. 나는 크게 한숨을 내쉬고 까칠하게 마른입 안으로 국물을 떠 넣고 젓가락을 힘껏 쥐고 꾸역꾸역 칼국수를 먹었다. ‘잘 먹었습니다’하고 인사를 하며 일어서는 나에게 아주머니는 끓어오르는 냄비 속의 국수를 휘저으며 말했다. “입맛이 없어도 부지런히 먹고 힘을 내야 하는 거야.” 마치 나의 오늘을 훤히 꿰뚫는 듯한 아주머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나는 환하게 웃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핸드폰을 켜니 ‘미안하다’는 본부장님과 팀원들의 걱정이 담긴 메시지가 줄줄이 떴다. 어느새 내 얼굴엔 잔잔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결국 선임 선배와 나는 사이좋게 프로젝트를 잘 끝냈고 나의 일탈은 그저 한낮의 해프닝에 불과하게 되었다.‘먹고 힘을 내야 한다’는 아주머니의 격려 덕분이었을까? 마법처럼 나를 이끌어 토닥토닥 마음을 위로했던 시장 칼국수 – 아주머니에게 감사하며 조금 더 맛있게 먹을 걸 그랬다.
아네고 에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