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복죽
나의 첫 사수는 늘 한 손에 담배를 들고 인상을 구겨가며 회의시간마다 거친 말을 쏟아내던 갓 대리를 단 남자 선배였다. 낯가림이 심했던 나는 이 선배와 나란히 붙은 책상에 앉아야 하는 것도 하루 종일 그가 피워 대는 담배연기를 참는 것도 무척이나 힘이 들었다. 그러나 내가 첫 부 사수였던 그는 마초 같은 행동과 말투와는 달리 나에게 이것저것 많은 걸 배려하고 가르쳐 주려고 애를 썼다. 스스로 낯가림을 얼른 떨쳐낼 수 있도록 회의시간마다 빠짐없이 나를 데리고 다니며 사람들 앞에서 한마디라도 더 하게 했다. 차츰 내가 이 선배의 스타일에 익숙해질 무렵 선배는 다른 회사로 스카우트가 되어 떠났다. 마지막 날, 회의실 탁자 위에 신문지를 깔고 늦은 저녁으로 짜장면을 먹으며 선배는 나에게 말했다. “너는 근성이 있으니 잘할 거다. 어려운 일 있음 연락해라.”
그가 떠난 후 나는 두 번째 사수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작년에 사내 결혼을 하고, 출산을 몇 개월 앞둔 차장 2년 차 여자 선배였다. 각진 금테 안경을 쓴 차가운 인상에 또박또박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결과가 없는 회의와 소모적인 야근을 몹시 싫어했다. 선배는 어떤 일이든 그 속에서 내 몫과 책임을 주었고 그것에 대한 잘잘못을 분명히 나에게 알려주었다. 그리고 조금씩 나아지는 결과물에 대해서는 아낌없는 칭찬을 해주었고, 그런 그녀의 말에는 분명 나를 한 발짝 더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 있었다. 그 당시 선배들에게 자신의 아이디어를 어이없이 빼앗긴 걸 원통해하던 내 동기들을 생각하면, 나는 운이 좋았다.
선배는 맡은 일도 잘했고 그녀만의 카리스마가 넘쳤음에도 불구하고, 결혼한 여인의 어쩔 수 없는 한계에 부딪힐 때마다, 그녀를 시기하던 다른 이들이 토해내는 불평불만을 들어야 했다. 나는 그런 상황이 너무 싫었다. 곧 명절과 시어머니의 생일을 앞둔 그녀는 아직 끝나지 않는 프로젝트를 앞에 두고 고민에 빠져 있었다. 나는 큰 줄기가 잡혔고 대부분이 완성되어 가는 단계이니 내가 마무리하겠다고 그녀를 안심시켰다.
예상대로 일이 흘러갔다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터였지만, 마지막 본부장님의 리뷰에서 방향은 대폭 수정되었고, 추가로 급히 시안들을 만들어야 하는 엄청난 사태가 발생하고 말았다. 과연 선배 없이 내가 해낼 수 있을까? 하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공포에 가까운 두려움과 부담감에 내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다. 지방의 시댁으로 내려간 선배를 이 밤에 부를 수도 없고 어떻게 하든 나는 해내야만 했다.
그날 밤을 꼬박 새우고 잠깐 집으로 가 옷을 갈아입고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어느덧 해는 저물고 모두가 사라진 명절날의 텅 빈 사무실에 나는 혼자였다. 저 멀리서 희미하게 발걸음 소리가 들리며 점점 또렷해졌다. 뒤돌아 보니 선배였다. 아무래도 걱정이 되어 저녁 기차로 지금 막 돌아오는 길이라고 했다. 반가워 어쩔 줄 몰라하는 나를 보며 선배는 말했다. “저녁은 먹었니? 이런 날은 입맛도 없지? 그럴 거 같아서 내가 전복죽을 사 왔다. 같이 먹고 힘내서 얼른 마무리 하자!”선배는 전복죽을 먹으며 내가 준비한 시안들을 찬찬히 검토했다. 그리고 환하게 웃었다. “너 이제 제법이다. 나 없어도 문제없겠어.”
선배의 칭찬에 그동안의 마음고생이 눈 녹듯 사라졌고, 감격한 나머지는 콩닥거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나는 전복죽을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뒤적이기만 했다.
일에 대한 자신감과 재미를 알게 해 준 선배와 함께 한 전복죽 – 그 고마운 마음에 깊이 감사하며 식기 전에 조금 더 맛있게 먹을 걸 그랬다.
아네고 에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