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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ego emi Jun 20. 2024

빨간 팬츠

거기서 뭘 그리라는 거야?’

‘ 할머니들 쇼핑하고 떡 사 먹고 차 마시는 풍경을 그리라는 건가?’

‘ 빨간 팬츠?”


첫 과제가 떨어졌다. 할머니들의 하라주쿠라고 불리는 곳에 가서 스케치를 해오라는 것이다. 인상 깊은 장면이든 오브제든 상관없으며 표현의 방식 또한 자유라고 했다. 대 회의실을 꽉 매운 청춘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오늘따라 한 껏 멋을 부리고 온 Y는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어이없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는 피식하고 웃음을 터트리며, 그녀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얻으며 말했다. “일단 가서 둘러보면 뭐든 그리고 싶은 게 있을 거야.”


화창한 봄날, 유난히 햇살이 눈부신 주말이다.  특별한 약속은 없지만 그래도 갈 곳이 있다는 생각만으로 마음이 들떴다.  오늘 나의 목적지는 내 첫 과제의 무대가 될 할머니들의 하라주쿠다.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쇼핑을 하는 할머니들을 훔쳐보며 별다를 것이 없는 쇼핑가를 걷는다.  손으로 만든 지갑이며 손수건, 부채, 머릿수건, 가방 등이 즐비하고, 이곳에서 가장 잘 팔린다는 빨간 팬츠가 곳곳에 진열되어 있었다. 사각의 거들에 가까운 이 빨간 팬츠는 할머니들의 과감한 도발을 의미한다고 했다. 수줍게 미소를 지으며 서로의 빨간 팬츠를 골라주는 할머니들의 모습이 소녀처럼 환하게 빛난다. 아마도 이곳에서만 가능한 일일 것이다.  크지 않은 동네라 골목골목 빠짐없이 몇 번을 돌고, 작은 절이 있는 공원 벤치에 할머니들과 나란히 앉아 시큼한 조청을 바른 떡꼬치를 먹었다.  얌전하게 두 다리를 모으고 오물오물 떡을 씹는 두 할머니들과 눈이 마주친 나는 빙긋하고 웃음을 짓는다.  그러자 나에게 환한 미소를 지으며 할머니들이 합창을 하듯 동시에 말했다. “ 참 맛있네요… 그렇지요?”그 순간, 할머니들의 그 말이 나에게는 이렇게 들렸다. “ 인생은 참 살만해요. 그렇치요?”

<아네고 에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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