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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ego emi Jun 27. 2024

못 그려서 미안합니다

“ 제발… 제발 졸지 말아 주세요.” 나와 스케치북을 마주하고 앉은 D군에게 나는 속삭이듯 말했다.  오늘 데생 수업은 선생님이 정해준 파트너의 얼굴을 그리는 것이다. 유난히 수줍음이 많은 D군은 나와 짝이 되자 도톰한 입술을 쭉 내밀며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와 나란히 앉은 나와 제법 안면이 있는 K군이 안심하라는 듯이 D군을 힐끗 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후덕한 미소를 최대한 뿜어내며 D군에게 잘 부탁한다 는 인사를 먼저 건넸다. 두 사람이 교대로 10분씩 서로의 얼굴을 그렸다. 그런데 문제는, 시간이 갈수록 내 차례가 되자 그의 눈꺼풀이 점점 내려오기 시작했다 는 것이다. 인물 데생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가 되는 것이 다름 아닌 눈인데, 그 눈이 꺼져가는 촛불처럼 서서히 빛을 잃어가며 수시로 휘청였다.  조용조용 그를 깨워가며 그림을 그리려 애쓰는 나를 선생님이 무심하게 보다가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 고생이 많아요… 이것저것.”


수업의 말미에 각자가 그린 그림을 쭉 펼쳐놓고 짧은 품평회를 했다. 그런데 D군이 쭈뼛쭈뼛 자신이 그린 그림을 펼쳐놓기를 망설인다. 내가 그린 그의 그림은 실물보다 낫다며 주변 여학생들이 감탄이 쏟아져 나왔다. D와 단짝인 K군이 그가 가슴팍에 꼭 끌어안고 있는 스케치북을 억지로 빼앗아 그림을 펼쳐보고는, 순간 '헉' 하는 짧은 감탄과 함께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D군의 깊은 한숨이 기다렸다는 듯이 터져 나왔다.'


'결국, 선생님의 단호한 지시에 의해서 자신의 그림을 펼쳐놓은 D군은 고개를 숙인 채 조심조심 나의 반응을 살피는 것 같았다.  나는 다른 학생들의 그림을 쭉 돌아보다가 마지막으로 그와 그가 그린 내 그림 앞에 섰다. 사람들 앞에서 어쩌다 거울 보는 것도 쑥스러워하는 내가, 타인의 눈에 비친 나를 보는 것은 분명 당황스러움 그 차체일 터였다. 그런데 그것을 넘어 한마디로 충격적이었다. 쭉 찢어진 눈에 길쭉한 코와 조그만 입술. 긴 머리는 삐쭉삐쭉 빗자루처럼 아래도 뻗어있었다. 마치 D군과 그 무리들이 쉬는 시간에 즐겨보는 만화책 속의 괴물 같았다.  갑자기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자 고개를 푹 숙인 D군은 몸을 비비 꼬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가 그린 그림을 본 나고야의 Y와 제법 어른스러운 그녀의 무리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수업이 끝나고 오늘의 정리 당번인 나는 쓰레기통을 비우고 교실을 정리하는데, D군이 슬금슬금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도라에몽이 그려진 초코우유 하나를 내밀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김상, 정말로 미안합니다.  내가 그린 그림은 당신과 하나도 안 닮았습니다. 제가 그렇게 밖에 못 그려서… 정말로 미안합니다. 그러니 속상해하지 마세요. 제발…” 나는 또 한 번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네고 에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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