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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ego emi Jul 02. 2024

만화 읽어주는 아저씨

어느덧 여기저기 벚꽃이 만개한 봄의 절정이다. 날씨도 바람도 하늘도 더할 나위 없이 지금이 봄이라는 것을 알리는데 모자람이 없다. 그냥 걷기만 해도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냥 봄의 한가운데로 초대받아 그곳에 존재한다는 느낌이 든다. 주렁주렁 가방을 들고 등교를 하다가도, 쿡쿡 쑤셔 되는 어깨를 두들이며 무심코 노을 진 하늘을 올려보다가도... 내가 도쿄에서 맞이하는 또 한 번의 봄을 그냥 보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까맣게 있고 있었던 약속처럼 번쩍하고 떠올랐다.  


주말에 해야 할 과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그만 통창을 통해 쏟아지는 봄 햇살에 마음을 뺏긴 나는 집을 박차고 나왔다. 근처 공원이라도 갈 요량이었다. 그러나 마음을 고쳐먹고 무작정 기차에 올라 기치조지의 공원으로 향했다. 공원초입의 유명한 꼬치구의 집에서 꼬치구이 세트를 사고, 편의점에서 차가운 맥주 몇 캔을 샀다. 그리고 벚꽃놀이를 하느라 북적이는 인파들 사이에 나도 그들의 일행인양 자리를 잡고, 하늘하늘 흔들리는 벚꽃을 올려다보며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씩씩하게 맥주 한 캔을 따서 크게 삼키고, 아직도 온기가 남아있는 닭꼬치를 먹었다. 어느덧 혼자 먹고 마시는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이런 내 모습을 누군가에게 들키기라도 할까 봐 금세 무겁고 서늘해지던 마음도 언제부터인가 편안해졌다.  


적당히 취기가 오르자 공원을 한 바퀴 돌아보고 싶어졌다. 손수 만든 액세서리와 아마추어와 프로의 솜씨가 섞인 다양한 작품들 그리고 공연을 하는 무리들… 그 속을 온화한 봄바람 같은 미소를 머금은 채 유유히 걸었다. 그때 어디선가 ‘얍!’하는 기압소리가 들렸다. 오대오 가르마를 하고 어깨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를 한 중년의 아저씨가 단정히 무릎을 꿇고 스케치북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 앞에 다소곳이 앉은 한 여성의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이 진기한 풍경의 주인공은 바로, 이 공원의 명물인 만화 읽어주는 아저씨다. 페이지마다 한 장 한 장 확대 복사 해 스케치북에 붙인 만화를 손님 앞에서 읽어준다. 그냥 읽는 것이 아니라 라디오 극장 성우처럼 목소리 연기를 하며 실감 나게 읽어준다. 단 한 명의 손님을 위해 읽어주는 이 만화는, 인기 만화가 방영되는 티브 앞으로 모여드는 꼬마들처럼 사람들을 모여들게 했다. 어찌나 연기솜씨가 뺴어난 던 지 나 또한 한참을 넋을 놓고 들었다. 나는 무엇보다 한 번도 흩트러지지 않는 아저씨의 표정과 그 프로다운 진지함과 몸짓에 주목했다. 아저씨에게 이 일은 그냥 먹고살기 위해 하는 일이 아님이 분명해 보였다. 


일을 떠난 나에게 그런 일이 다시 올까… 그런 일은 내가 간절히 원하는 일일까, 나를 간절히 원하는 일일까… 머릿속에 복잡해졌다. 얼른 돌아가서 과제를 마무리해야겠다. 

<아네고 에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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