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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ego emi Jul 11. 2024

타인의 언어로 살아가는 일

말하는 시간보다 듣는 시간이 많아지고 있다.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아이들의 조잘거림을 듣고, 길거리에서 어디선가 터저나 오는 수많은 행인들의 말을 듣는다.  외국에서 자신의 언어가 아닌 타인의 언어로 살아가는 일은, 지금껏 한 번도 꺼낸 적이 없는 나를 꺼내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실새 없이 떠들어야 적성이 풀리고, 침묵을 몹시도 못 견뎌하던 내가,  미소를 머금은 과묵함으로 나의 부족한 언어를 대신한다. 그리고 그 어떤 이야기도 감정의 기복 없이 차분하게 들어줄 마음의 준비를 하고 귀를 쫑긋 세운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듣기 싫은 소리, 짜증 나는 소리… 지금까지 이런저런 이유로 나로부터 침묵을 강요당하거나, 몰살되고 무시되었던 그 많은 누군가의 소리들이… 이곳에서 메아리가 되어 나에게 되돌아온다.  그리고 그 메아리를 향해 똑바로 걸어가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팀원들이 모두 퇴근을 하고 텅 빈 사무실에 혼자 남아 창 밖을 내려다본다. 어느새 빽빽이 도로 위를 매우던 불빛들이 깜쪽같이 사라지고 텅 빈 주차장처럼 휑하다. 한 때는 이런 모습을 동경했다. 한 순간도 일을 놓지 못하고 고뇌에 찬 프로페셔널의 깊은 터널 같은 밤을… 그 터널 같은 밤을 통과하고 또 통과하면 어느덧 모두가 부러워하는 내가 되어있을 것이라 굳게 믿었다. 그런데 나는 그 터널 속에서 길을 잃었다. 깜깜한 그 속에서 덩그러니 나 혼자 남았다. 


“ 어, 누님 아직 퇴근 안 하셨네요? 전화해도 안 받길래 오늘은 웬일로 일찍 가셨나 했죠.”

서글서글한 반달눈을 하고 살가운 미소를 짓는 기획팀 후배 H는, 요즘 날마다 퇴근길에 나에게 들려 가벼운 농담을 나누기도 하고, 커피나 달달한 간식 등을 건네기도 한다.  최근 들어 벼랑 끝에 몰린 듯한 나의 처지도, 시름시름 말라가는 내 몸과 총기를 잃어가는 희미한 내 눈빛도, 아마도 그에게는 무척이나 불안해 보였음에 틀림없다.  나는 억지로 빙긋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러나 그 웃음의 쓴 맛은 감출 수가 없다는 듯이,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그르르 돌았다. 그와 나란히 불빛을 잃어가는 창가를 등지고 서서 하루의 흔적을 고스란히 남기로 사라진 팀원들의 책상을 잠시 내려다본다. 다들 애쓰고 있는 거다. 나만큼. 아니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나로 인해 그들을 더 힘들게 해서는 안된다. 내 욕심, 내 명예, 내 자존심, 내 꿈을 이유로 그들의 발목을 잡는 일은 없어야 한다.

<아네고 에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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