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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ego emi Jul 18. 2024

누군가의 진심 어린 응원

무슨 일이든 잘하려고 하면 더 잘 된다. 그림도 마찬가지다. 나는 대충 형태만 겨우 잡은 스케치북을 뚫어질 듯 보다가, 잔뜩 힘이 들어간 어깨에 힘을 빼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 순간, 내 등뒤에 서 있던 크로키를 가르치는 T 선생님이 내 어깨를 긴 막대자로 가볍게 툭툭 치며 말했다. “ 기무… (나의 성씨인 김을 그는 일본식으로 기무라고 불렀다) 인간이 이런 식으로 서 있을 수도 이런 식으로 포즈를 취할 수도 없어. 허허… 참”


떤 그림에서도 좋은 점을 먼저 찾아내어 칭찬부터 시작하는 대부분의 선생님들과 달리, 크로키를 담당하는 나이가 지긋한 T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독설을 아끼지 않는다. 특히 나에게는 심하다 싶을 만큼 잔소리에 가까운 코멘트들을 쉬지 않고 내뱉곤 하셨는데, 그 이유가 참으로 인간적이라면 인간적이다. 다른 학생들보다 더블로 많은 내 나이를 생각하면, 내가 이해력과 순발력이 그들보다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그러하기에 나에게는 더 혹독한 가르침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웬만한 잔소리에는 끄덕도 하지 않을 만큼 달고 달은 나였지만, 이렇게까지 매번 실수를 지적을 당하고 그 이유에 관해서 설명을 반복해서 들을 때면, 나의 재능을 슬슬 의심하다가, 과연 내가 인간의 육체를 자유자재로 그릴 수 있게 되는 날이 오기는 올까 하는 절망감에 허우적 됐다.  


뉘엿뉘엿해가지는 가파른 언덕길을 터벅터벅 떠밀리듯 내려가는 나의 뒷모습은, 아마도 하루종일 업무에 시달리고도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했던 과거의 나와 비슷하리라. 그런 나를 빤히 보며 반대편에서 걸어오던 T 선생님은 내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 한 번도 수업 시간에 본 적이 없었던 살가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체력도 두배로 바닥인 거야? 허허허 ~ 이거야 말로 큰일이네. 음… 일단 나를 따라오도록…” 나는 오던 길로 다시 성큼성큼 앞장서는 T 선생님을 적당한 간격을 두고 뒤따라 걸었다. 선생님은 철로변 골목길에 있는 작은 라면 가게 앞에 멈춰 서고는 힘차게 가게 문을 열었다. 선생님에게 알은체를 하는 주인장의 손짓에 따라 구석의 카운터 자리에 선생님과 나는 나란히 앉았다. 선생님은 나에게 묻지도 않고 미소라면 두 그릇을 주문하고 무심하지만 자상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 기무야… 이 집은 미소라면이 정말 제대로야. 한 그릇 뚝딱 하면 아무 생각이 안 난다. 그저 맛있다 하는 생각밖에…” 그리고는 껄껄껄 큰 소리를 내며 웃었다. 


선생님과 나는 아무런 말도 없이 후루룩 후루룩 소리를 번갈아 주고받으며 라면 한 그릇을 맛있게 비워냈다. 선생님의 말대로 라면은 너무 맛있었다. 하루종일 주먹밥 2개로 버틴 나의 위장은 구수하고 짭조름한  라면 국물까지 남김없이 받아내고는 드디어 포만감의 신호를 보냈다. 선생님은 차가운 보리차를 컵에 반쯤 따라서 나에게 건네며 말했다. “ 부지런히 그리면 무조건 되는 거야. 지금처럼… 그런데 하나 더… 더 많이 그려야 돼. 다른 애들보다 더 많이… 스케치북은 내가 두둑하게 챙겨줄게.”선생님은 나와 헤어지며 다시 한번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한 손을 들어 올렸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하고 돌았다. 나는 선생님의 뒷모습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꼿꼿하고 흔들림 없는 어둑어둑한 길쭉한 형태가 내 눈앞에서 흐릿해지다가 서서히 멀어져 갔다. 


그 후로 선생님은 선배들이 남기고 간 스케치북을 챙겨서 몰래 나의 사물함에 넣어두셨으며, 내가 정리 당번인 날에는 캔커피를 건네며, “음… 좋아”하고 뜬금없는 말을 건네기도 하셨다. 누군가의 진심 어린 응원을 받는다는 것은 이런 것인지도 몰랐다. 대단한 기대를 하지 않지만 언젠가 꼭 해내리라는 믿음을 나에게 주는 것… T 선생님처럼 그리고  내가 회사를 떠나기로 결심한 그날의 H처럼 말이다.  “ 누나… 그냥 지금처럼 하면 뭐든 해낼 거야. 이제는 그냥 좀 편했으면 좋겠다.”

<아네고에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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