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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ego emi Aug 01. 2024

뜻밖의 공평함

소위 일본에서 그림 천재들만 간다는 도쿄 예술대학교를 나온 조각가 K 선생님은, 우리 학교에서 가장 인기 있는 선생님이다. 선생님의 데생 수업은 늘 진지하지만 편안함과 따뜻함이 있고, 예리한 눈을 가진 선생님의 촌철살인 같은 코멘트는 우리의 손과 머리를 자발적으로 움직이게 했다. 


나는 선생님의 수업이 참 좋았다. 하얀 도화지에 선 긋는 것부터 선생님에게 배운 나는, 차근차근 선생님의 내어주는 과제를 근근이 해내며, 언제나 선생님의 수업에서 가장 칭찬을 받는 학생이 되었다. 그 이유는 정확히는 잘 모르겠지만, 선생님은 내가 그려내는 힘없고 연약한 선들에게 자신감을 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아울러, 기계처럼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눈에 비친 대로 그려내는 것이 나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했다. 소위 그것을 자신만의 스타일이고 부르는데, 데생에서 그걸 표현해 내는 것은 굉장한 장점이 된다고 했다. 


이 나이가 되어도 칭찬을 듣는 일은 기쁘고 벅찬 일이다. 나는 언제나 수줍게 웃으면서, 마지막까지 남아 교실 정리를 도우면서 선생님에게 한없는 감사의 마음을 보냈다. 나와 반대로 H는 무슨 이유인지 늘 선생님에게 날카로운 질책을 들었다. 선생님은 똑같이만 그리려고 하니 자신만의 개성을 찾을 수가 없다고 했다. 이런  작품은 포트폴리오에 넣어봐야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차갑게 말했다. 그녀는 그럴 때마다 고개를 숙인 채 푸우하고 한숨을 쉬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 눈에는 더없이 잘 그린 그림인데 선생님의 눈에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런 일은 유학을 간 한국 미대생들에게 종종 있는 일이라고 했다. 고교 시절부터 스파르타식으로 입시 미술을 배운 그들은 거의 완벽에 가까운 데생을 해내는데, 자신만의 시각과 개성을 강조하는 외국 선생님들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못마땅한 듯했다. 그러니 차라리 나처럼 예초부터 기초가 없는 학생들이 더듬더듬 배워가며 제멋대로 그려내는 그림들이 더 특별해 보이는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세상 일들은 기대하지 않았던 전혀 다른 한 면을 들어냄으로써 뜻밖의 공평함을 깨닫게 한다. 나의 무지가 나의 개성이 될 줄이야. 아니 최소한의 나의 개성을 꽃피울 수 있는 백지의 씨앗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는 그림을 그리는 매 순간이 긴장되고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싶다는 마음보다 그릴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그런데 일을 할 때는 그와 정반대였다.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보다 하고 싶다는 마음이 앞섰다.  그 둘의 차이를 명확히 짚어낼 수는 없으나, 어렴풋이 드는 생각은 전자가 절박함이라면 후자는 자신감에 가까운데, 전자의 절박함이 내 그림의 개성으로 스며든 반면에 후자의 자신감은 내 일에 대한 당돌함으로 비쳤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어느 쪽이든 힘들고 괴로운 상황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다행스러운 점은 그 결과적인 측면에서는 둘 다 나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그 절박함으로 지금 그림을 그리려고 온갖 애를 쓰고 있는 것이다. 

<아네고 에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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