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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ego emi Jul 25. 2024

도쿄의 여름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도쿄에서 맞는 세 번째 여름 - 이제 이 살인적인 무더위의 역습에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그들처럼 이 더위를 조금씩 즐기는 법을 터득한 것이다. 나의 첫 번째 일본 친구인 A의 도움으로 유니클로에서 화사한 유카타를 한 벌 장만하고, 그녀의 집 근처에서 펼쳐지는 불꽃놀이를 구경하러 갈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달뜬 미소를 지었다.


여름 방학중이지만,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출석률이 좋은 학생에게만 기회가 주어지는 보충수업을 들으러 갔다.  우리 모두가 가장 어려워하는 크로키와 데생 수업이다. 오전부터 푹푹 찌는 더위 속에서 우리를 위해 포즈를 취해주는 감사한 누드모델을 위해 에어컨도  틀지않고 숨을 죽인 채 모두가 크로키에 열중하고 있다. 두 선생님들이 제법 큰 교실을 돌며 틀린 곳을 지적해 주고 수정 방향을 제시해 준다. 연신 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핑그르르 어지럼증이 몰려들 즈음에 드디어 오전 수업이 마무리되었다. 여전히 나의 실력은 바닥이고 제대로 완성한 스케치는 한 장도 없었다. 다행히 이 수업에서는 평가는 이뤄지지 않는다. 보충수업이니 부족한 실력을 보충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면 그만이다. 축 처진 어깨와 젖은 솜뭉치처럼 무거운 몸을 일으켜 세우고, 오후의 데생 수업을 준비한다.


늘 용돈이 빠듯한 반 친구들과 같이 호토모토 도시락 가게에서 가장 싼 닭튀김과 막 지은 스몰사이즈의 따뜻한 흰밥을 사고, 편의점에서 차가운 녹차 한 병을 산다. 수업이 시작되기 전 교실에서 우리는 도란도란 모여 앉아 도시락을 먹었다. 반찬이라곤 딸랑 닭튀김이 전부이지만, 조미료가 가미된 맛소금을 밥 위에 솔솔 뿌려서 같이 먹으니 제법 감칠맛이 돌았다. 국물 없이 밥을 먹는 것이 익숙하지 않지만, 이곳 도쿄에서의 대부분의 식사에는 국물이 없다. 처음에는 도무지 음식이 넘어가지 않았으나 이제는 익숙해졌다. 밥 한알도 남기기 않고 깨끗이 먹어치우고, 이젤을 펴고 빈 페인트 깡통하나를 꽤 차고 연필을 깎는다. 나는 이 순간이 참 좋다. 사각사각 연필 깎는 소리가 낙엽 밝은 소리처럼 귓가를 맴돈다. 옆반의 한국 유학생 H가 한 손에 물렁물렁한 지우개를 조물조물 거리며 나에게 다가왔다. 한국에서 패션 디자인을 전공한 그녀는 물론, 원조 일본통이며 일본어에 능숙하고 그림을 배우러 왔기보다는 일본에서 살고 싶은 것이 우선인듯했다. 그녀는 한국에서 입시미술을 한 덕에 데생에서는 단연코 최고 수준의 완성도를 보였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랬다. 그녀는 쌍꺼풀 없는 커다란 반달눈을 깜빡이며 나에게 말했다. “ 언니, 나 쓰러질 것 같아. 수업 끝나고 몸 보신하자. 맥주도 한잔 하고.”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네고에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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