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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ego emi Aug 08. 2024

나아가고 있다


“ 소고기 덮밥 보통에다 장국, 김치 추가 그리고 생맥주 하나요.” 잔뜩 골이 오른 H는 학교 앞 단골 소고기 덮밥 집에  들어서자마자 빈자리를 확인한 후, 차가운 보리차를 내오려는 아르바이트 생을 향해 유창한 일본어로 말했다. 이곳은 그녀와 내가 중노동에 가까운 그림 그리기에 기력이 달릴 때마다 영양 보충을 하러 오는 곳이다. 이 집의 소고기 덮밥은 간장 소스에 살짝 데친 얇은 우삼겹과 깍둑 썬 두부, 채 썬 양파와 대파를 넣고 흥건하게 조린 후,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고봉으로 담은 하얀 밥 위에 푸짐하게 고명으로 올려준다. 달짝 지근하면서도 짭조름한 그 맛이 먹으면 먹을수록 당겼다. 우리는 입가며 입술에 고기 기름과 간장 소스를 잔뜩 뭉친 채 시원한 맥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그렇게 먹고 마시며 수다를 떨어가며 소고기 덮밥 한 그릇과 맥주 한잔을 뚝딱 비우고 나면 몸도 마음도 든든해졌다. 

 

이미 배가 부를 만큼 불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우리만의 비밀장소에서 2차를 제안했다. 그곳은 그녀와 내가  늦은 하굣길에 자주 맥주 한 캔을 비우며 수다를 떠는 곳으로, 녹차 빛깔의 강물을 내려다볼 수 있는 다리 위다. 강 아래쪽으로 축 늘어진 긴 나뭇가지 덕분인지 강 속에서 자라는 녹색의 식물 덕분인지 그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이 강은 분명 탁한 녹차색이 났다. 초저녁의 노을빛이 얼룩얼룩 섞인 이 강물의 오묘한 빛은 감탄을 자아내기 충분했다. 그녀와 나는 어느새 미지근해진 맥주캔을 만지작 거리며 멍하니 강물을 내려다봤다. 나는 무심하게 말했다. “이제 잘 그리려고 하지 말고 내 멋대로 그리려고 해 봐. 솔직히 난 잘 그리고 싶지만 잘 그릴 수가 없어서 내 멋대로라도 그려야지 하는 생각으로 버티지만, 넌 이미 잘 그리잖아. 그냥 멋대로 그려봐. 이래도 저래도 문제라면 그냥 맘대로 하는 거야. 까짓 거…” 그녀가 맥주 한 모금을 크게 삼키고 나를 보고 빙긋 웃는다.  


그 시절, 우리는 정말로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그림에 매달려 어떻게든 앞으로 한 발짝이라도 나아가 보려고 애를 쓴 걸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와 나는 연약한 서로를 의지하며 나아가고 있었고 나아간다고 믿고 싶었는 지도 모르겠다. 

<아네고 에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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