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nego emi Aug 15. 2024

응원의 메시지


가끔은 길을 잃는다. 그것도 도쿄에 온 이후로 가장 자주 가게 되는 신주쿠 한복판에서… 어둑어둑 해가 지고 퇴근 시간에 몰려드는 인파에 휩쓸려 걷다 보면 순간 어지럼증이 몰려온다.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내 주위의 사람들이 빠른 속도로 지나가고 알록달록한 불빛들이 휘청이기 시작한다. 나는 구토감을 느끼며 바닥에 주저앉고 만다. 그런 나를 아무도 의식하지 않는다. 빨강노랑머리의 여고생들이 그들만의 은어를 하이톤으로 짧은 비명처럼 내뱉으며 지나간다. 그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우고 주위를 두리번 거린다. 여기가 어디지? 


일본인 친구 A는 약속 시간보다 한참을 늦게 나타난 나를 걱정 어린 눈빛으로 반갑게 맞는다. 핏기 없이 새하얀 내 얼굴에 조금씩 생기가 돈다.  그녀는 과제와 학원제 준비로 부척 수적 해진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며 살갑게 말한다. “ 언니, 오늘은 맛있는 걸 먹어야겠다. 좀 비싸긴 하지만 한국 음식과 술로 언니에게도 ‘고호우비’를 …  ”일본어의 ‘고호우비’라는 말은 스스로에게 칭찬이나 응원의 의미로 주는 포상을 의미한다. 그녀와 나는 새로 생긴 한국 음식점으로 가서 감자탕과 한국 소주 그리고 그녀가 좋아하는 한국 김과 창난 젓갈, 나물 세트까지 단숨에 주문을 하고 차가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새 한국어가 더 유창해진 그녀는 어제 본 한국 드라마 이야기에 열을 올리다가 가끔씩 초점 없이 허공을 응시하는 내 눈과 마주친다. 그리고 어느새 보글보글 끊고 있는 감자탕을 한 국자 퍼서 내 그릇에 담으며 말한다. “ 언니, 무슨 고민이 있는 거야? 그림 그리는 거 힘들어? ”나는 숟가락으로 감자탕 국물을 몇 번 휘젓다가 한 숟가락을 떠서 입속으로 가져가며 말한다. “ 글쎄… 자꾸 내가 이렇게 살아도 되냐 싶어서.”그녀는 말없이 소주잔에 소주를 따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다. “ 한국에 있는 선후배들은 다들 일하느라 정신이 없고 그만큼 경력을 쌓아가고 돈도 벌고 있는데… 나는 어린아이들 틈에 둘려 쌓여서 말도 안 되는 그림이나 그리고 있으니까… 뭐 내가 선택한 일이긴 한데… 나중에 두고두고 후회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도 되고… 이곳이 내가 떠나온 곳과 너무 비슷해서 그런 지 여기에선 자꾸 두고 온 내가 보여. 그 순간마다 나는 길을 잃어.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내가 서 있는 이 길이 맞는 것인지… ” 나는 한숨을 내뱉으며 소주잔을 단숨에 비웠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안주 거리를 챙겨주고 술을 따라주었다. 그녀도 나도 알고 있었다. 이 질문의 답은 나만이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해낸 무엇은 우리가 해내는 무엇이 아니라 우리한테서 이루어지는 무엇이라고 했다. 아침에 해가 뜨고 저녁에 해가 지듯이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번아웃이 되고 그토록 천직이라 믿었던 일을 떠날 것을 단숨에 결심하고, 낯선 이곳으로 와서 그림을 그리게 된 것도, 내가 해낸 것이 아니라 때가 되어 내게 이루어진 것인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간순간 드는 회의와 불안은 익숙해진 집단을 떠나 혼자가 되었다는 고독감과 지금까지의 노력과 성과를 스프링보드 삼아 더 멀리 뛰어오르는 그들에 비해 다시 출발선에 선 나의 초라함 때문일 것이다. 그 끝은 알 수 없지만 지금의 현 상황으로선 내가 불리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인생의 2막을 위해 과감한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용기와 배짱이 두둑한 척을 했지만, 결국 나는 힘겹고 고되었던 초심자의 길을 다시 씩씩하게 걸어갈 만큼은 아니었다. 무엇인가에 등 떠밀리듯이 나는 앞으로 나아갔고 그것이 운명이라고 믿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라는 인간은 어딘가에 미친 듯이 대책 없이 꽂히는 유형이 아니다. 충동적이고 쉽게 싫증을 내면서 스스로 완벽하지 않음을 자학한다. 모든 일이 그러하겠지만 이런 성격으로 꾸준히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광고회사에서 10년을 넘게 버틴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인지도 모른다. 혹은 내가 그 일에서 만큼은 스스로의 한계를 넘어 결코 지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용기와 배짱이 작가로 살겠다는 나의 새로운 선택지에서 생겨나길 간절히 바랄 뿐이다. 


금세 소주 두 병이 비워졌다. 그녀와 나는 시답잖은 농담을 하며 하루의 우울했던 기분들을 지워낸다. 나는 어느새 막차 시간이 다가온 것에 깜짝 놀란다. 그녀가 서둘러 계산을 하고 이번에는 자신이 쏘는 것이라고 돈을 건네는 내 손을 밀어낸다. 그녀와 나는 팔짱을 끼고 잰걸음으로 역으로 향하고 각자의 전철에 올라탄다. 그녀 덕분에 마음이 힘을 낸다. 신주쿠에서 타는 막차는 언제나 붐빈다. 다닥다닥 낯선 이의 몸과 발이 나와 한 덩어리가 되어 네모난 통속으로 밀려들어간다. 다시 어지럼증이 몰려오는 순간, 멀쑥하게 키가 큰 외국인 남자와 눈이 마주친다. 파랗고 회색빛이 감도는 그의 눈빛에서 묘한 광채가 뿜어져 나온다. 그는 뚫어져라 나를 응시하다가 환한 미소를 짓는다. 나와 그 사이에 장벽처럼 있던 사람들이 다음 역에서 우르르 무너져 내리자 그와 나는 연인처럼 마주 보고 서 있다.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키가 큰 그의 목에 걸린 엄지 손가락 만한 보라색 스톤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아무런 말 없이 나를 내려다보다 가 또 미소를 짓는다.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이고 애써 취기를 몰어내며 정신을 똑바로 차린다. 어느덧 다음이면 내가 내릴 역이다. 문을 열리고 내가 성큼 플랫폼으로 발이 딛는다. 그 순간 또 핑그르르 어지럼 증이 몰려본다. 휘청이는 나를 그가 잡는다. 그리고 나를 벤치로 데려가 앉히고 내 무릎 앞에 마치 프러포즈를 하는 사람처럼 꿇어앉는다. 그리고 유창한 일본어로 내가 말한다. “ 당신에게서 슬픔의 기가 흘러요. 나는 그런 사람들을 그냥 보낼 수가 없어요. 특히 당신처럼 맑은 영혼을 가진 사람들은 더요.”그러고 나서는 그의 목에 건 보라색 스톤이 달린 목걸이를 나의 목에 걸어주며 다정하게 말한다. “ 이것이 행운의 스톤이 되어줄 겁니다. 당신에게 줄게요. 슬픔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저 당신의 소중한 감정일 뿐입니다. 슬픔이 너무 많을 땐 이 스톤의 행운을 믿어봐요.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어요. 지금 그대로…”어쩔 줄 몰라 멍하니 있는 나에게 그는 할 일을 끝냈다는 듯이 가볍게 손을 흔들고 사라졌다. 순간 나는 술에 취해서 헛것이 보이는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내 목에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고개를 숙여보니 보라색 스톤이 달린 목걸이가 내 목에 걸려 있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그러다가 웃음이 났다. 저 낯선 외국 남자는 어쩌면 하늘에서 나에게 보낸 응원의 메신저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목에 걸린 보라색 스톤을 가만히 쥐어본다. “ 그래,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내가 여기에 온 것도, 오늘 내가 겪은 일들도… 그냥 가 보는 거다 “

<아네고 에미>

이전 18화 나아가고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