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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ego emi Aug 22. 2024

가을 학원제

가을 학원제. 대학으로 치면 대학축제일 것이다. 내가 다니는 이 학교의 공식 명칭은 도쿄디자인학원으로 2년제 전문학교다. 학원제는 1학년이 메인이다. 2학년이 되면 졸업 작품과 취업 준비로 정신이 없고 대부분 학교 일에는 관심이 없다. 학원제라고 해 봐야 과 별로 작품 전시가 전부이지만, 학원제 기간 동안 타과의 작품들을 볼 수 있고, 마음에 드는 작품의 주인공과 짧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며,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졸업생 선배들에게 자신의 작품을 어필할 수 있고 조언을 구할 수도 있다. 축제 분위기를 주도하는 것은 단연 만화과 학생들이다. 자신들이 좋아하는 만화 속 주인공 코스프레를 하고 무리를 지어 복도와 강의실을 요란하게 배회한다.  


다소 무거운 주제를 학원제의 테마로 정한 우리 과는 시작부터 원성이 자자했다. 이런 주제로 뭘 그리라는 것인가, 이 주제 자체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등등… 첫날부터 청춘들의 불만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나 또한 피상적인 그 주제가 모호했으나, 그럴수록 내 맘대로 해석해서 그리면 그만이지 않은가. 솔직히 광고 회사를 다니면서 수없이 받은 광고주의 피드백 또한 다 그런 식이다. 결국, 나는 그렇게 생각해서 이렇게 했다고 우기면 그만이다. 나는 별무리 없이 1차 러프 스케치와 계획서를 담당 선생님에게 제출했고, 그림책과 정밀 일러스트를 가르치는 깐깐하기로 소문한 담당 선생님에게 아낌없는 칭찬을 들었다. 


그 덕분에 나의 그림은 한걸음 더 발전하게 된다. 선생님은 나에게 아크릴 물감으로 작업을 할 것을 권했다. 한 번도 아크릴로 그려본 적이 없어 망설이는 나에게 선생님은 다정하게 말했다. “ 아크릴은 얼마든지 수정이 가능한 도구야.  망치면 하얀 물감을 바르고 다시 그리면 되고 자신이 없으면 덧칠을 하면서 수정 작업을 해도 아무 문제가 없어. 그러니 자신감을 가지고 도전해 보자. 새로운 도구가 네 편이 되면 네가 그릴 수 있는 세계가 더 커지는 거야. ”선생님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이 가진 여분의 아크릴 물감을 나에게 나눠 주겠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신주쿠에 있는 도쿄에서 가장 큰 화방에 들러 A2 사이즈의 나무로 된 캠퍼스 화판과 눈에 들어오는 컬러의 아크릴 물감 몇 가지를 샀다. 화방 직원이 누런 재생지로 겹겹이 싸주는 화판을 왼팔에 끼고 역까지 씩씩하게 걸어가는 동안, 왠지 그림이란 걸 제법 그려본 진짜 미대생이 된 듯한 기분이 들어 우쭐해졌다. 내일은 이 화판 위에 하얀 제소 물감을 1차로 바르고 밑그림을 스케치해야 한다. 담당 선생님의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면 그 위에 물감을 재벌하고 컬러작업에 들어간다. 그때부터 길고 긴 혼자만의 여정이 시작된다. 그러나 자신감이 들었다. 나에게는 든든한 지원군이 있지 않은가. 학교에서도 까다롭기로 유명한 이 업계의 실력파 선생님이 전적으로 나를 지도해 주기로 먼저 손을 내미셨으니까… 이참에 선생님에게 그림에 관해 많은 것을 질문하고 도움을 얻을 생각이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 그 행위는 정말 무엇인가. 단지 어떤 것을 있는 그대로 그린다는 것인가, 아니면 보이는 것 이상의 무엇을 자신만의 감각으로 표현해 내는 것인가. 그렇다면 나의 이런 형편없는 그림실력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고, 내 느낌대로 표현을 하려고 해도 자꾸 소심해지는 이 마음은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 것인가.  초심자의 마음이 다 그렇다고 해도 타고 난 재능이 있다면 조금은 달라야 하는데, 과연 나는 재능이라는 걸 조금이라도 가진 것일까 … 묻고 싶은 질문은 끝이 없고 그 질문들이 매번 선생님과의 수업의 말미에 맴돌았지만 나는 끝내 하나도 묻지 못했다. 그 이유는 선생님과 작품을 완성해 가는 과정에서 그 답들을 나도 모르는 사이에 깨닫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세상과 나를 발견하고 그리는 과정이라는 것을. 그것은 재능의 문제가 아니며 내가 품고 가진 것을 얼마나 자신 있게 꺼내 보일 수 있느냐 의 문제라는 것을. 그것은 대단한 용기와 결심 따위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저 연필과 붓을 들고 그리기 시작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을.


내가 컬러라는 생명력을 불어넣자, 희미한 검정선에 불과했던 그림들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러자 욕심이 났고 그 욕심이 하얗게 밤을 지새우게 했다. 선생님을 만날 때마다 선생님은 평소와는 다른 모습으로 호들갑에 가까운 칭찬 세례를 나에게 퍼부으며 말했다. “ 너무 좋잖아. 이거… 여기만 더 신경 쓰면 다음번에 내가 깜짝 놀라서 소리를 지를지도 모르겠다 ” 칭찬은 고래도 춤을 추게 한다고 했던가, 선생님의 칭찬은 아크릴 물감에 품었던 두려움을 서서히 희석시켜 거침없이 새로운 컬러를 쓰는 과감함을 키워주었으며, 여전히 색연필과 마커를 쥐고 그림을 그리는 친구들의 부러움을 사게 했다. “ 우와, 언니 이제 아크릴로 그림을 그리는 거야? 망칠까 봐 두렵지 않아?  대단해! ” 물론, 망치는 것은 두렵다. 그러나 망치면 다시 그리면 된다 라는 단순한 명제를 머릿속에 예상하고 그림을 그리면 이외로 술술 그려졌다. 

<아네고 에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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