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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ego emi Aug 29. 2024

모두의 축제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주말은 그림을 그리기에 최적의 날이다.  조그마한 내 공간은 집보다 작업실에 가깝고, 길가 쪽으로 난 창문을 활짝 열고 빗소리를 마음껏 들으며 그림을 그릴 수 있으니까. 창 밖의 사람들은 모두 우산을 쓰고 빠른 걸음으로 갈 길을 가고, 그 덕분에 어쩌다 민망하게 눈이 마주치는 일도 없다. 그림 그릴 준비를 하고 냉장고에 넣어둔 화이트 와인을 한 잔 따르고 적당한 음악을 고른다. 이런 날은 스케치 보다 채색을 하는 것이 더 어울린다. 빗소리와 함께 하얀 캠퍼스에 그림들이 알록달록한 물안개처럼 피어올라 조그마한 방 안을 꽉 채운다.  점점 빗소리와 그림과 음악과 와인에 취해간다. 내 머릿속에 가득 찼던 고민과 걱정들이 말끔히 비워지고 오롯이 지금 이 순간에 몰입하게 된다. 이런 기분으로 쭉 그림을 그릴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로 사는 삶이란 이런 기분의 연속이기를 마음속으로 바랬다. 


드디어 학원제 전날, 밤을 새워 가까스로 완성한 그림을 지정된 공간에 걸어놓고, 반과 내 이름이 새겨진 네모난 이름표를 그 옆에 붙인다. 작품이 걸린 벽면 앞에 작은 책상을 놓고, 그 위에 작품에 관한 간단한 설명을 프린터 한 보드와 나의 작품들이 담긴 포트폴리오, 작품의 감상평을 남길 수 있는 방명록을 놓는다. 이것으로 준비는 끝이다. 전시관을 지킬 당번을 정하고 그동안 작품 준비로 고생한 서로에게 환한 미소를 보낸다.  


한국 유학생 H와 나는 새로 생긴 만두 집에 들러 만두와 볶음면을 주문하고, 시원한 생맥주 한 잔으로 피로를 달랜다. 그녀는 맥주를 크게 한 모금 삼키며 노릇노릇 갓 구워낸 만두를 입안 가득 밀어 넣고 힘차게 씹으며 말한다. “ 어차피 별 기대 안 해. 난… 내 그림은 원래 학교에서 인기가 없잖아. 그런데 이 학교는 왜 맨날 그림을 두고 인기투표 같은 걸 하는지 몰라. 좀 유치하지 않아? 선생님들이 평가하고 피드백을 주면 좀 좋아?”

심술이 난 꼬마처럼 입을 삐죽이며 맥주를 마시는 그녀를 보며 나는 빙긋이 웃는다. 그도 그럴 것이 이 학교는 뎃상과 크로키를 제외하고 작품을 평가하는 기준이 남달랐다. 선생님의 의견보다 학생들의 의견이 더 크게 반영되었다. 과제를 제출하는 날이면 과의 모든 학생들이 작품 품평회를 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 앞에 자신의 짧은 감상을 적어 놓아둔다. 메모지를 가장 많이 받은 학생이 그 과제에서 최고점을 받는다. 인기가 많은 작품의 주인공은 수업 말미에 선생님이 건네는 메모지들을 흐뭇한 표정으로 양손 가득 받아 든다. 물론, 모든 작품들을 향한 선생님의 친절하고 세심한 코멘트도 빠지지 않는다. 그러나 아직 십 대인 그들에게는 동료들의 평가가 더 간절했으리라. 이런 평가 방식이 효과적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서로의 작품에 관심을 가지고 응원을 해주는 것이 점점 자연스러워진다. 본능적으로 단점보다 장점을 먼저 찾게 된다. 어쩔 때는 작품의 주인공조차도 몰랐던 매력과 장점들이 타인의 시각에서 발견되고, 자신의 세계관을 찾는데 자신감을 불어넣기도 한다. 


학원제 첫날 H와 나는 학교 근처를 배회한다. 행여 우리의 작품에 관심이 있는 선배나 후배가 우리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연락이 오면, 냉큼 달려가야 한다. 이때야 말로 작품에 관한 좋은 조언을 들을 수 있는 절호의 찬스다.  미대와 음대가 많은 이곳은 학원제 기간 동안 거리 공연을 한다. 카페, 식당, 서점, 화방 등등 다양한 가게가 줄지어 있는 거리 곳곳에 작은 공연장을 만들어 클래식을 연주하고, 미대생들은 행인들이 원하면 캐리커처나 인물 스케치를 무료로 그려준다. 우리 학교는 만화과 학생들이 주변 라면 가게 주인장들의 얼굴을 그려서 전시하고, 그들의 간단한 자기소개와 메인 메뉴를 자랑하는 코너를 마련한다. 역시 우리 학교의 부스가 가장 인기다.  이곳 주민들을 위해 학생들은 그들의 재능을 기꺼이 발휘한다. 이번 기회를 빌어 학생들에만 주는 음식 서비스, 학생 할인 쿠폰, 학생들에게 제공하는 무료 전시 공간 등, 그간의 고마움을 전한다.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랫사람들이 웃음소리와 음악소리가 기분 좋게 뒤섞인다.  우리는 가장 표를 적게 받은 라면집에 가서 라면을 먹고, 서비스로 내어준 덮밥까지 싹싹 비워낸다. 여전히 우리의 전화는 울리지 않는다. 역시 우리의 그림은 인기가 없다. 새삼스러울 일도 아니지만 조금 서운한 기분이 든다. 그때였다. 내 전화가 울린다. 오늘 당번인 L이 약간 상기된 목소리로 말한다. “언니, 언니 작품을 보고 또 보는 누군가가 있어. 얼른 와 봐. 언니가 작품 설명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냐?”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애써 진정하고 그녀를 그곳에 남겨둔 채 서둘러 학교로 갔다. 

<아네고에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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