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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ego emi Sep 05. 2024

그렇게 작가가 된다

유난히 까맣고 긴 머리카락의 가냘픈 소녀가 내 작품 앞에 서 있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그녀의 눈이 반짝였다. 나는 그녀 곁으로 조심스레 다가가서 꾸벅하고 인사를 하며 말했다. “ 제 작품에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자 그녀가 코끝에 걸린 안경을 살짝 밀어 올리며 말했다. “ 너무 멋진 작품이에요. 마음에 꼭 들어요.  가늘고 섬세한 선도 좋고 컬러감도 좋아요. 언젠가 같이 전시를 해보면 좋을 것 같아요.” 나는 부끄러운 마음에 어쩔 줄을 몰라하며 감사하다는 말을 연거푸 내뱉는다. 같은 과 2학년 선배인 그녀는 중국인 유학생이다. 그녀의 도움으로 나는 그해 겨울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상실의 시대’ 영화 속에 등장했던, 긴자의 작은 화랑에서 전시를 하게 된다. 그리고 생애 처음으로 작품을 팔게 된다.  중국의 유명한 화가 부모에게서 태어난 그녀는 단연 그림 천재다. 그 천재가 내 그림을 칭찬할 줄이야. 그 후로도 그녀는 졸업하기 전까지 내 그림을 늘 응원해 주었고 그녀 덕분에 나는 가늘고 섬세한 선으로 끊임없이 그림을 그리게 된다.  0.05mm의 검정 유니팬 … 이것이 나의 최애 도구가 된다. 


어떻게 작가가 되느냐 는 질문에 한 선생님이 답했다. ‘너희들의 작품에 누군가가 돈을 지불하는 순간, 너희들은 작가가 된다. 글을 쓰는 사람이 책을 내야 작가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자 또 다른 누군가가 연이어 묻는다. ‘그림 그려서 먹고살 수 있나요?’ 선생님은 알듯 말듯한 미소를 머금고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는 반짝이는 눈들과 잠시 눈을 맞춘 후 큰 소리로 답했다.  “그럼… 그리고 싶은 것이 계속 있다면… 반드시 먹고살 수 있다. 핵심은 그리고 싶은 것이 계속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다” 그때 나는 단지 그것이 문제라면 나는 그림을 그려서 먹고살 수 있다고 자신했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는 것은 다 그려보고 싶었고, 단지 그림 실력이 부족해서 그릴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고 싶은 마음과 그리고 싶은 것은 별개의 문제다. 그리고 싶은 마음이 있어도 그리고 싶은 것이 없으면 그릴 수가 없다. 지금에야 나는 선생님의 하신 말씀의 참뜻을 깨닫는다. 그림 실력은 노력과 연습으로 키울 수 있지만 그리고 싶은 것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글이 막히듯 그림도 막힌다. 그리고 싶다는 마음이 그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옮겨가는 순간, 그리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막막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그린다는 행위 자체를 스트레스로 느끼게 한다. 좋아하는 것이 일이 되면 상황이 180도 달라지는 것과 비슷한지도 모르겠다.


긴자의 작은 갤러리에서 내 그림을 산 사람은 미술계 관련 잡지사에 근무하는 30대 중반의 기자였다. 아마추어들의 그림을 사 모으는 것이 취미인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긴자의 작은 갤러리들을 돌며 마음에 드는 그림을 산다.  이 갤러리를 운영하는 여사장과는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기에 긴자에 올 때마다 안부 인사차 빠짐없이 이곳에 들렀고,  때마침 그때 내 그림이 전시되는 날이었다. 한류 드라마에 푹 빠져있던 50대 초반의 갤러리 여사장은, 내가 한국에서 온 나이 지긋한 여인이라는 것을 안 순간부터 줄곧 한국 드라마 이야기를 했다. 그 덕분에 그녀와 나는 금세 편해졌고,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친절하게 들어준 대가인지 내 그림을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걸어주었다. 그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그녀는 알은체를 하며 반갑게 인사를 하며 말했다. “ 오늘 멋진 작품들이 전시 중이에요.  여기 작가님도 와 계시네요. 도쿄 디자인 학원 학생이에요.” 그와 나는 멋쩍은 인사를 나눴고, 그는 작은 회의실 크기 정도의 갤러리를 천천히 둘러보다 내 작품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 순간을 놓칠 새라 여사장은 그에게로 가 나에게 들은 작품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 이게 0.05mm 유니펜으로 그린 거래요. 이 머리카락이랑 옷들의 섬세함을 보세요. 볼수록 놀라워요.  선이 참 부드럽고 따뜻해요. 이런 그림은 작가의 열정과 성실함이 없이 불가능하죠.”그녀는 말끝에 나를 힐끗 보며 이쪽으로 오라고 손짓을 했다. 나는 어색하게 그녀 옆에 서서 그녀가 은근슬쩍 그에게 작품을 사라고 부추기는 것을 목도했다. 그는 표정 없는 얼굴로 그림을 빤히 처다 보다가 한쪽 입고리를 살짝 올리며 미소 지었다. 그리고 갑자기를 고개를 돌려 나를 보며 말했다. “ 혹시, 제가 주제를 드리면 그림을 그려줄 수 있어요? ”순간, 당황한 나는 침묵했고, 나를 대신해 그녀가 말했다. “ 그럼요, 그럼요… 그릴 수 있죠… 그릴 수 있죠? 김상? ” 나는 대답대신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날 전시된 내 그림을 샀고 뿐만 아니라, 그림 값을 미리 제시하며 자신의 원하는 그림의 주제를 적은 쪽지를 나에게 건넸다.  

<아네고에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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