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로 유학을 오면서 엄마와 통화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한참 일하던 시절 언제나 시간에 쫓기던 나는 어쩌다 엄마에게 전화가 걸려오면, 다짜고짜 꼭 필요한 말만 하라고 서두에 못을 박았다. 그때의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더 이상 부모에게 손 벌리지 않고 스스로 내 밥벌이를 하는 것만으로도,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충분히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엄마 주변의 친지들이며 친구들의 자식들에 비해 나는 그 누구보다 독립적이고 내 길을 개척해나가고 있다고 믿었고, 그런 자부심을 엄마에게 안겨주는 것은 최고의 효도라고 생각했다. 냉정하고 자기 주관이 강한 엄마는 자신을 닮은 나의 행보를 늘 응원했다. 물론, 도쿄로 유학을 떠나겠다고 전화로 선언을 했을 때도, 엄마는 조금도 망설임 없이 쿨하게 답했다. “ 네 인생이니 네가 알아서 결정해라”
평소에 대화가 없었던 내가 엄마와 길게 통화를 하게 된 이유는, 어쩔 수 없이 엄마에게 원조받아야 하는 한국의 물품들 때문이었다. 내 힘으로 뭐든지 해결하던 그때와 다른 처지가 된 나는, 먹고사는데 필요한 물건은 물론이고, 미처 다 처리하지 못했던 자잘한 세금 관련 처리들도 엄마에게 부탁해야 했다. 마흔을 코 앞에 두고 이런 부탁을 해야 하는 것이 염치가 없었던 나는, 예전 처럼 할 말만 하고 매정하게 전화를 끊을 수가 없었다. 나는 몇 배의 통화요금을 감수하고도 나의 일상과 엄마의 일상을 공유하며 긴 통화를 이어가곤 했다. 그때 처음으로 나는 깨달았다. 엄마는 그녀의 소소한 일상 이야기를 나눌 대화 상대가 간절했다는 것을… 자존심이 강한 엄마이기에 타인에게 할 수 없던 이야기를 마음속에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있었다는 것을… 그 이야기 속에 엄마의 외로움과 공허함이 묻어난다는 것을… 그리고 나는 그 길고 긴 통화를 통해 처음으로 엄마를 조금씩 이해하고 있었다.
멍하니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토요일 저녁, 엄마는 다짜고짜 전화를 해서 내가 꼭 들어줬으면 하는 소원이 있다고 했다. 나는 미소를 머금고 장난스럽게 말했다. “ 뭐든 말씀만 하세요. 들어줄만한 거면 내가 다 들어준다” 그러자 엄마는 차분한 목소리로 내일 오전 10시경에 도쿄에 사는 이모를 만나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모와는 미리 약속을 해놓았으니 약속장소로 가기만 하면 된다고 덧붙였다. 나는 기억 속에 가물가물한 이모의 얼굴을 떠올리며 그러겠다고 하자, 엄마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 그리고… 음… 이모를 따라 성당에 갔으면 좋겠다. 네가 이참에 신앙을 가지는 것, 그것이 내 소원이다” 오랜 천주교 신자인 엄마는 한 번도 자식들에게 신앙을 강요한 적이 없었다. 그런 엄마가 뜬금없이 이모를 핑계로 성당에 갈 것을 요구하니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이곳에 있는 내내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던 나는, 거부감보다는 한 번쯤은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나는 노력해 보겠다고 담담하게 답했다.
일본인 남편을 둔 이모는 엄마와 달리 유쾌하고 시원시원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이모는 고등학교 때 보고 처음 보는 나를 단박에 알아보고 손을 크게 흔들었다. 이모는 거침없이 내 팔짱을 끼고 근처 버스 정류장으로 가 정차해 있는 버스에 성큼성큼 올랐다. 분명 엄마에게 성당에 꼭 데려가라는 미션을 받은 것이 분명한 이모는 버스에 나란히 앉은 나에게 연신 반갑다는 말과 함께 지금 우리가 가는 곳은 도쿄에 있는 제일 큰 한국 성당이라고 했다. 신도들이 다들 너무 좋고 무엇보다 신부님의 설교가 참 좋다는 말을 덧붙이며, 미사를 끝내고 성당에서 주는 비빔밥의 맛이 끝내준다며 환하게 웃었다. 나는 오랜만에 함께 성당으로 갈 동무가 생긴 것이 신이 난 듯 달뜬 이모의 얼굴을 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모의 말처럼 신도들은 모두 적당히 거리를 두고 친절했고, 신부님의 설교는 인생을 살아가는데 좋은 덕담에 가까웠고, 이모가 사준 비빔밥은 너무나 맛있었다. 고봉으로 주는 밥과 나물을 쓱쓱 비벼 모두 맛나게도 먹었다. 그런 서로의 모습을 힐끔 거리며 신나게 숟가락 질을 했다. 그 후 이모와 나는 근처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길고 긴 수다를 이어갔고, 그것도 아쉬워서 신주쿠로 와서 이모의 단골 이자카야에서 맥주잔을 기울였다. 이모는 인생의 굴곡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밝고 명량했다. 여유롭지 않았지만 베푸는 것에 인색하지 않았고 어떤 상황이든 타인에 대한 배려를 잊지 않았다. 나는 그런 이모와 보내는 시간이 좋았다. 저녁 시간부터 이른 새벽까지 한국 고급 요정집의 주방에서 일하는 이모는, 나를 위해 도시락 크기의 락앤락 통에 나물은 물론이고 각종 밑반찬과 잡채, 갈비찜과 같은 요리들을 넘치도록 담아 성당으로 가져오곤 했다. 미사 후 언제나 이모와 함께 점심을 먹고 차를 마시고 근처 공원을 산책했다. 한 달 후 나는 서례를 받기 위해 교리 공부를 시작했고, 매주 일요일마다 빠짐없이 성당을 오가며 교우들과 친분을 자연스럽게 쌓아갔다. 그리고 어느 날 나는 또 하나의 어머니를 만나는 행운을 얻게 된다. 그분은 바로 늘 그립고 감사한 나의 대모님이다.
<아네고 에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