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정장을 꺼내 입었다. 어디를 가든 정장 한 벌 쯤은 챙겨야 한다는 엄마의 말을 듣길 잘했다. 하얀 블라우스와 회색 스프라이트 정장 그리고 검정 구두... 면접의 정석 같은 옷차림... 몇 번이고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집을 나섰다. 화장한 날씨와 기분 좋은 바람이 나를 응원한다. 오늘은 나의 세례식 날이다. 어젯밤 나보다 더 들뜬 엄마는 너무 기쁜 일이라며 내가 팀장으로 승진을 했던 날보다 더 흥분했다. 세속적이라 생각했던 엄마를 오해했는 지도 모르겠다. 엄마라는 존재는 이해하면 할수록 신비롭고 대단하다. 성당은 오늘따라 축제 분위기다. 아름다운 꽃들이 장식이 되어있고, 오늘의 주인공인 세례자들을 위해 곱게 차려입은 축하객들이 분위기를 더한다. 그들 안에는 나를 자신의 딸처럼 사랑하는 이모와 나를 자신의 딸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대모님이 있다. 두 분의 미소가 나에게만 비치는 조명처럼 환하다. 그 미소 속에 나는 부유한다. 이런 기분을 이런 감정을 무어라 표현하면 좋을까. 기분이던 감정이던 이름을 정해주면 그것은 영원히 내 것이 된다고 했는데 나는 지금 이 순간 그것을 정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오늘이 끝나고 내가 눈을 감는 순간, 아마도 이 순간을 어쩌면 내 세례명이기도 한 그라시아... 은총이라고 혼잣말을 할지도 모르겠다.
내 뒤편에 서서 나를 보좌하는 대모님이 있다. 신부님이 45도로 기울인 내 머리 위로 성수를 붓고 그녀가 내 옷이 젖지 않도록 얼른 수건으로 부드럽게 내 얼굴을 닦아낸다. 신부님이 나를 보고 환한 미소를 지으신다. 울컥 눈물이 나려는 걸 애써 참는다. 맨 앞줄에 앉아 나를 보며 어쩔 줄 몰라하는 이모를 본다. 기념사진을 찍는 교우에게 최고로 이쁘게 나를 찍어야 한다며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한다. 역시 못 말리는 우리 이모다. 그렇게 세례식이 끝나고 오른쪽에 이모를 왼쪽에 대모님을, 이곳에서 나를 가장 사랑하는 두 사람과 함께 정식으로 천주교 신자가 된 첫 미사를 본다. 그리고 나는 대모님의 말씀처럼 첫 미사의 말미에 빌 세 가지 소원을 떠올린다. 그녀에게 소원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와 달리 어쩌면 남은 내 생을 위한 마음의 다짐이자 마지막 꿈이 될지도 모르는 세 가지 소원을 결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기준이 명확했기 때문이다. 과거의 가장 아팠던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것. 미래의 나를 책임질 것. 다시 나를 가슴 뛰게 할 것.
대모님의 내 머리 위에 하얀 면사포 같은 미사보를 씌워준다. 나의 양손을 하나씩 나눠가진 두 분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틈만 나면 나와 눈을 마주치려고 애를 쓴다. 나는 그분들에게 지금까지 짓지 못했던 미소를 아낌없이 나눠주고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소원을 빈다. 첫 번째 소원은 그 누구도 나로 인해 마음의 상처를 받는 일이 없기를 소망한다. 그간 나는 일이라는 명분으로 독설을 너무 쉽게 남발했다. 그 독설들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처음으로 혼술을 했던 나였지만, 입장이 달라지자 나도 모르게 지독히도 싫었던 선배들의 행태를 반복한다. 욕을 하면서 닮아간다던 그 말이 거짓이 아니었다. 절대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그 옛날의 다짐은 일을 더 잘하고 싶은 욕심 앞에 희석된 지 오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따르던 내 팀원들이 갑자기 떠나는 일이 생기면 세상을 다 잃은 것 같은 공허함이 밀려왔다. 그리고 알게 되는 뼈 아픈 진실. 나도 잘 기억이 나지 않은 내가 던진 그 한마디가 그에게 비수가 되어 상처를 입고 그토록 믿었던 자신의 능력과 열정을 의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내가 뭐라고 하고 그때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넘겼던 그 일들이 내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였다. 언젠가 꼭 미안하다고 그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었다. 나는 그런 말을 할 자격도 없을뿐더러 당신들은 나보다 훨씬 대단한 존재였다고. 단지 나의 부족함을 당신들에게 억지로 전과시키려던 나의 객기였을 뿐이라고. 나는 남은 생 결코 이런 일을 다시 저지르는 실수를 내 몫으로 남기지 않겠다고 다짐을 한다. 첫 번째 소원이라는 강력한 명분으로.
경쟁에서 이겨야 산다. 내가 선택되어야 내가 빛난다. 광고회사란 이런 곳이다. 자유롭지만 그 자유로움 속에서 때를 기다린다. ‘그래, 네가 뭘 꺼내 들지 보자’. ‘내가 뭘 생각하고 있는지 기대해.’ 끊임없이 누군가의 아이디어를 원하고 평가한다. 그 평가에 살아남는 아이디어와 그 아이디어의 주인공이 승리자가 된다. 매일 이런 일들을 반복하며 월급을 받는 것이 광고회사의 일이다. 물론, 어떤 이유든 협업이라는 명분도 빠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 속에도 우열이 있고 지분이 다르다. 내 아이디어. 내 프로젝트... 대놓고 말을 하지 않을 뿐이다. 나는 더 이상 이런 헤게모니에서 살아남으려 애쓰며 살지 않기로 다짐한다. 어차피 내 능력으로 먹고살아야 한다면, 내가 만드는 그 무엇이 경쟁에서 살아남기보다는 그 누군가에게 이롭기를 원한다. 다시 말해 나는 두 번째 밥벌이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작가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으니, 내가 만드는 작품이 경쟁에서 살아남기보다는 단 한 명의 독자라도 그 누군가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 나의 팬덤이 되길 바란다. 그 덕분에 나는 작가로 남을 생을 살게 되길. 이것이 나의 두 번째 소원이다.
‘ 누나, 영원이가 하늘로 갔어 ‘ 울먹이며 전화를 하던 후배의 목소리. 그토록 나를 보고 싶어 했던 그를 나는 영정 사진으로 만났다. 내가 첫사랑이라고 했다. 대학 시절 내내 나의 주위를 맴돌던 그를 나는 눈치재치 못했다. 그러던 그를 처음으로 의식하게 된 것은 그가 군대에서 보낸 편지 때문이었다. 남학생이 많은 과에 다녔던 나는 군대를 간 동기들이나 선배들에게 편지를 수도 없이 받았다. 지금 세대들은 모르는 학과 편지함에 언제나 내 이름으로 온 편지들이 쌓였다. 나는 봉투 위에 이름만 확인하고 읽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데, 그중에 아마도 그에게서 온 편지도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4학년이 되어 광고회사 인턴으로 정신이 없었던 시절, 졸업 논문을 쓰기 위해 주말이면 도서관에서 보내야 했다. 오랜만에 나를 발견한 과 동기가 피곤에 절어 반쯤 눈을 감고 원서를 뒤적이는 나에게 자판기 커피를 건네며 말했다. “ 야, 너한테 온 편지 엄청 쌓였다. 찾아가라. 보낸 사람 성의를 봐서라도. 편지 쓰는 거 그거 생각보다 대단한 일이다.” 대단한 일... 그 마지막 말이 내 마음을 흔들었다. 맞는 말이다. 카피한 줄 쓰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길고 긴 문장의 퍼레이드인 편지를 쓰는 일은 대단한 일이 분명하다. 나는 피곤한 몸을 짐짝처럼 둘러업고 깜깜한 복도를 지나 편지함에서 본능적으로 나에게 온 직사각형의 대단한 일을 기록한 그것들을 집어 들었다.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하나둘 그 대단한 일을 해낸 이들의 이름을 확인하다가 낯선 이름을 발견했다. ‘ 우 영원… 누구지? ‘ 편지의 내용은 흔히 이등병의 다큐에 나올만한 일상이 제법 주옥같은 문장들로 이어졌다. 아하... 군대란 이런 곳이었지... 하며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장을 넘겼다. 그는 지금까지와 다른 낯선 일상으로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떨어진 이방인의 고뇌를 써내려 가며, 말미에 일상의 모든 것이 그립다는 말로 끝을 냈다. 그리고 PS. '당신은 나를 모르겠지만 나는 당신을 날마다 수없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당신이 없는 내 일상의 풍경은 상상할 수 없어요. 당신도 나를 한 번쯤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언젠가 꼭 만나고 싶습니다. 한 번쯤은...' 유난히 덜컥 되는 버스 탓인지 심장이 요동쳤다. 편지를 접어 가방에 넣고 네온사인이 요란한 창밖을 본다. ‘누굴까?”
그 후에도 그는 나에게 서너 통의 편지를 보냈고 나는 딱 한번 답장을 보냈다. 그가 제대를 앞두고 마지막 보낸 편지에서 그는 자신의 사진을 동봉했고, 그 사진을 보는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나는 그를 안다. 그는 나와 친했던 과 후배의 친구다. 그가 나를 이토록 마음에 두고 있었는지 상상도 못 했다. 그리고 몇 년 뒤에 나는 막 대리를 달고 이제 신입사원 후배가 들어온다고 신이 났던 시절, 그때 우연히 그를 회사 구내식당에서 만나게 된다. 엄청난 경쟁률에도 불구하고 당당히 신입사원으로 합격한 그는 나를 단박에 알아보고 어쩔 줄 몰라한다. 식판을 양손으로 움켜쥐고 얼어붙은 채 나를 보며 감격의 눈물이라도 흘릴 기세다.
그와 나의 비밀 연애가 시작되었다. 내가 그에게 마음을 연 것은 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나의 20대를 마치 자신의 추억처럼 쏟아내는 그의 섬세함 때문이었다. 그 시절 나는 늘 일에 허덕이며 나라는 존재는 일에 도움이 된다 안된다라는 두 가지 기준을 평가되는 하찮은 인간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런 나를 이토록 멋지게 기억해 내는 그에게 나는 감동을 너머 감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의 연애는 오래가지 못했다. 나에게는 그보다 일이 우선이고 사내 연애도 부담이 되었다. 내가 다른 회사로 스카우트가 되어 가면서 그와도 자연스레 헤어졌지만, 그는 힘들어했다. 그 후로 시간은 흘렀고 그의 소식도 가끔 친한 후배들의 모임에서 듣곤 했다. 아무도 우리의 비밀 연애를 모를 거라 생각했지만, 그에게도 속을 터놓는 회사 동기가 있었고, 그 동기가 나와 친하다는 사실은 내가 그의 존재를 지울 수 없는 빌미를 남긴다. 기억에서 까마득해지는 그 순간에 걸려온 전화 한 통은 그의 이름처럼 나에게 영원히 그를 기억하게 하고 만다. “ 누나, 다시 한번 꼭 보고 싶은데... 누나는 나한테 그럼 사람인데... “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영원히 사라졌다. 과로사로 마흔을 갓 넘기고 하늘로 갔다. 나에게 아낌없이 사랑을 주고 그리움을 주고 하나도 돌려받지 못하고 그는 영원히 내 곁을 떠났다. 나는 그때 다짐을 했다. 다음에 누군가를 만나게 된다면 마음껏 사랑하리라. 연애 그 참을 수 없었던 가볍고 달뜬 감정에 충실하리라. 나의 세 번째 소원은 다시 사랑을 하는 것이다. 조금은 성숙한 그리고 받기보다 주는....
<아네고 에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