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에서는 공짜 전시가 많다. 제법 유명한 작가의 전시부터 무명작가의 전시까지, 관심만 있다면 정보를 알아내 공짜로 볼 수 있다. 학교에서는 국내외 다양한 작품 전시 정보를 게시판에 공유하는데, 늘 과제에 쫓기던 우리에게는 시간은 물론 마음의 여유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부지런을 떨어 전시를 보러 다녔다. 누군가 그림은 손재주가 아니라 눈재주라 하지 않았던가. 무엇보다 내가 도쿄로 유학을 결심한 것은 곳곳에 보물처럼 숨겨져 있는 미술관 때문이었다. 집들이 촘촘히 있는 주택가에 작가가 생전에 살던 집을 개조해 만든 미술관은 물론이고, 유명 건축가가 디자인한 감각적이고 유니크한 미술관, 형형 색색의 컨테이너를 전시관으로 이용하는 아이디어가 넘치는 미술관 등등, 다리품을 팔면 얼마든지 볼거리 가득한 미술관 순례가 가능해진다. 나는 서점에서 도쿄 미술관 가이드라는 책을 사고, 매주 한 곳씩 찾아다녔다. 공짜인 곳이 대부분이고 미대 학생증이 있다면 입장료는 반값이 된다. 아무리 작은 미술관도 햇살이 내리쬐는 아담한 정원이 있고 커피와 차를 파는 마실 수 있는 카페가 있다. 나는 쉬엄쉬엄 그림 구경을 하다가 정원을 거닐며 커피를 마시고 스케치를 하며 몇 시간을 보내곤 했다.
나는 유독 치히로 미술관을 좋아했다. 치히로는 수채화풍의 귀엽고 사랑스러운 일러스트를 그렸던 여류 작가다. 아이들은 물론이고 어른들을 위한 동화책을 많이 그렸고, 그녀의 일러스트를 싫어하는 일본인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연필로 쓱쓱 그려낸 스케치 위에 물을 듬뿍 머금은 흐릿한 수채화 물감들이 번지면서 모방할 수 없는 그녀만의 색감을 창조해 낸다. 그녀가 그려낸 아이들은 몽환적이면서도 사랑스럽고 그림을 보는 누군가에게 무언가 이야기를 건네는 느낌이 든다. 아이들을 그리는 것을 좋아했던 작가는 그녀의 작품 세계를 소개한 책에서 아이들을 잘 그리는 법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 아이들은 웃고 우는 것을 제외하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법을 몰라요. 대신에 손과 손가락으로 많은 감정을 표현하죠. 그것을 놓치지 않고 그리는 겁니다. 유모차에 누워있는 아기를 가만히 관찰해 보세요. 쉴 새 없이 조막만 한 두 손과 열 손가락을 꼬물꼬물 움직이며 무언가를 말하고 있을 거예요.” 그 후 나는 그녀의 조언대로 공원에서든 덴샤 안에서든 어디서든 아이들을 보면 얼굴보다 손가락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녀의 말대로였다. 내가 자신을 빤히 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면 나를 힐끔 거리며 두 손을 맞잡고 꼼지락꼼지락 거렸고, 내가 미소를 지으면 나에게 눈을 고정한 채 가볍게 몇 번 두 손바닥을 마주쳤다. 그녀처럼 대부분의 작가들은 자신들이 특히 중점을 두어 그리는 것이 있다. 그것을 일본어로 '고다와리(집요, 고집)'라고 하는데 작가의 작품에서 가장 주목해서 봐야 할 부분이다. 손가락이 그러하듯 어떤 작가는 머리카락에 또 어떤 작가는 옷의 주름의 디테일에, 작가마다 다양하다. 그걸 알고 보면 작가들의 작품을 볼 때마다 새로운 디테일과 표현력에 감탄을 하게 된다.
글을 쓰는 작가들이 책을 보면 글을 쓰듯 그림을 그리는 작가들도 미술관을 다니며 그림을 그린다. 나는 이 시간이 참으로 좋았다. 언제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화방에 들려 스케치북을 샀다. 부지런히 그리고 그려서 언젠가 그들처럼 잘 그리는 그날을 떠올리며 두 주먹을 불끈 쥔다. 그러나 그림은 잘 그리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더 잘 그려지지 않고, 완벽을 고집할수록 실력은 어느 순간 제자리걸음이다. 아마 내가 학교를 다니는 2년 동안 선생님에게 가장 많이 들은 말은 단연 ‘포기하지 마라’였는지도 모르겠다. 특히 인물 드로잉은 누구나 어려워하는데 이 장매물을 뛰어넘지 않으면 결코 수준 높은 그림을 그릴 수가 없다. 아무리 연습을 해도 인물 드로잉은 최악이라는 자학에 가까운 나의 불평에, 학교 내 유학생 모임 덕분에 안면을 트게 된 선생님 G는 말했다. “ 내가 방법을 하나 알려줄게요. 헌책방에 가서 과월호 패션 잡지 몇 권을 사고, 첫 페이지부터 끝까지 사진 속 인물들을 모두 다 그려보는 겁니다. 매일매일 10페이지 정도면 좋겠네요. 내 말을 믿고 딱 석 달만 해봐요. 그림 실력이 확실히 늘 겁니다.” 30대 중반인 그는 일본에서 그림 천재만 갈 수 있다는 도쿄 예술대학을 나와 국비 장학생으로 이탈리에서 유학을 하고,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는 작가이다. 나는 그의 전시회를 몇 번 보러 간 적이 있었는데 제법 고가에 팔리는 그의 작품들에 깜짝 놀라곤 했다.
나는 그의 충고를 따라 패션 잡지를 보며 인물 스케치를 시작했지만, 일주일을 채 넘기지 못했다. 퍼포먼스에 가까운 모델들의 포즈를 아무리 그려보려고 해도 그릴 수가 없었다. 나는 한숨을 크게 내쉬고 꼭 쥐고 있던 연필을 신경질적으로 던져버리고, 무작정 집을 나와 걸으며 혼잣말을 내뱉는다. ‘역시, 그 방법은 당신 같은 그림 천재들에게나 통하는 것이지 나 같은 똥손은 무리인 거야… 인물 드로잉… 포기인가… 나도 다른 애들처럼 고양이나 강아지, 꽃으로 넘어가야 하는 건가. 아... 나는 사람을 그리고 싶은데...’ 그 순간 환청처럼 선생님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 포기하지 마라. 포기하지 마라. 포기하지 마라.” 나는 편의점에 들러 맥주 한 캔을 사고 오늘따라 더 밝고 동그란 보름달을 올려다보며 맥주 한 모금을 크게 넘긴다. 알코올의 힘인지 스멀스멀 오기가 생기기 시작한다. ‘그래… 이왕 그리기 시작한 거 잡지 한 권만 끝내보자. ‘
<아네고 에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