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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ego emi Oct 10. 2024

가을 꽁치 구의

어느새 더위는 사라지고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더니 소리소문 없이 가을이 왔다.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하고 조금은 눈높이를 낮춘 파란 하늘이 펼쳐지고,  그 덕분에덴샤를 기다리는 시간이 즐거워진다. 오늘은 가을 날씨를 실감하며 학교 근처 공원에서 점심 도시락을 먹으며 주말에 놀러 가면 좋을 곳들에 관해 아이들과 수다를 떨었다. 도쿄 토박이인 M이 전갱이 튀김을 크게 한입 베어 물며 말했다. “ 음… 지금이 9월 중순이니까 … 일요일에 메구로의 꽁치 축제에 가면 좋겠다… 지금이 딱 제철인 꽁치를 숯불에 구워서 한 마리씩 공짜로 나눠주는데 그 맛이 끝내주거든.”라고 말하며 그 맛이 떠오르는 듯 침을 꿀꺽 삼켰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차가운 녹차를 한 모금 크게 마시며, 황금 같은 가을날 주말에 내가 갈 곳을 점지해 준 그녀를 보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오후 수업 내내 나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꽁치 축제를 떠올리며 괜스레 신이 나서 혼자 미소를 지었다. 


일요일의 날씨는 내 마음을 알아준다는 듯이 화창했고 바람은 알맞게 선선했다. 이모와 나란히 미사를 보고 대모님과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고 서둘러 성당을 나오려는데 이모가 내 팔을 잡는다. 이모는 나를 보며 특유의 장난기 많은 미소를 찡긋 지어 보이며 말했다. “ 조카야… 이모가 오늘 널 아주 재미난 곳에 데려가려고 하는데 말이야… 실은 한 번은 꼭 가고 싶었는데 혼자 가기도 그렇고 해서 지금까지 망설이기만 하고 못 갔단다.” 나는 잠깐 머뭇거리다 살갑게 이모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 “ 어딘데요? 이모가 가고 싶은 곳이 있다면 제가 같이 가야지요. 당연히…” 이모는 신이 난 듯 아이처럼 환하게 웃으면 팔짱을 낀 내 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 “ 메지로의 꽁치 축제… 오늘이 마지막 날이야. 거기 가면 꽁치를 숯불에 구워서…” 이미 M에게 들은 이야기가 똑 같이 이모의 입을 통해 반복되었고 나는 처음 듣는 이야기인양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이모는 공짜로 나눠주는 꽁치와 함께 마실 캔맥주는 자신이 쏘겠다고 덧붙이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메구로 역에서 내려 언덕길을 조금 올라가니 어디선가 뿌연 연기와 함께 고소한 생선 굽는 냄새가 솔솔 났다. 점심도 건너뛴 이모와 나는 잰걸음으로 냄새의 근원지를 향했다. 긴 줄이 늘어서 있고 길 가에 군데군데 놓인 기다란 테이블을 둘러싸고 사람들이 꽁치 구이를 먹고 있었다.  상가에서는 얼음을 가득 채운 아이스박스에 캔맥주와 음료수를 넣어두고 판매를 했다. 목이 마른 지 이모는 냉큼 생맥주 두 캔을 사들고 와서 나에게 내밀고 호기롭게 한 캔을 따서 입으로 가져갔다. 나는 그런 이모를 보며 내 몫의 맥주캔을 땄다. 허기진 뱃속으로 넘기는 첫 모금의 맥주는 언제나 최고다. 이 순간, 갓 구운 꽁치 한 조각이 간절해진다. 거의 한 시간을 기다려 받아 든 꽁치 구이는 생각보다 살이 통통하게 올랐고 제법 컸다. 곁들여준 동그란 실뭉치 같은 간  위에 간장이 베도록 적당한 양을 붓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꽁치 위에 반으로 조각을 낸 탁구공 만한 라임을 힘껏 짰다. 시큼한 라임향이 고소한 생선 냄새와 맛있게 섞였다. 나도 모르게 입안을 가득 채운 침을 꿀꺽 삼치고, 젓가락을 들어 조심조심 꽁치 살을 발라 새끼손가락 만한 살조각을 입 속으로 넣었다. 적당히 기름지고 담백한 맛이 났고 은은한 숯불향이 감칠맛을 더했다. 이모와 나는 제철인 그 맛을 인정하다는 듯이 수시로 서로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꽁치를 먹고 맥주를 마셨다. 어느새 뼈다귀와 대가리만 남은 빈접시를 내려다보며 아쉬운 듯 이모가 말했다. “ 이거 감질 맛나서 안 되겠다. 근처 어디 가서 서너 마리 더 먹자.”


이모와 나는 술과 밥을 파는 근처 '이치로'라는 이름의 노포로 가 아마도 이름이 '이치로' 인듯한 나이가 지긋한 주인아저씨가 숯불에 정성껏 구워주는 꽁치를 각각 두 마리씩 해치웠다. 물론, 빠지면 섭섭한 생맥주와 함께… 적당히 취기가 오른 이모는 내 얼굴을 빤히 보다가 양손으로 내 손을 부드럽게 쥐며 말했다. “ 우리 조카… 오늘도 너무 고마워… 나하고 여기도 와 주고 꽁치도 먹고 가을에 좋은 추억 만들어줘서. 우리 아저씨가 아프기 전에는 놀러도 자주 가고 했는데 요즘  좀 몸이 안 좋아. 다음 주에 검사 결과가 나오면 병원에 입원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하네.” 그리고 이모의 눈에는 금세 눈물이 차올랐다. 재혼으로 만난 이모부는 이모와 나이차가 제법 났다. 사업을 하는 이모부는 노는 것도 좋아하는 호탕한 성격이라고 했다. 함께 한국에 갔을 때 우리 집을 방문한 적도 있으며 우리 엄마와도 잘 통하는 사이였다고 이모는 자랑하듯 말했다. 나는 부드럽게 이모의 등을 쓰다듬으며 언젠가 나도 꼭 이모부를 한번 뵙고 싶다고 말하며 이모를 위로했다.


어느새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었다. 이모와 헤어지고 조금은 모자란 술을 채우기 위해 집 앞 편의점에서 캔맥주를 사들고, 편의점 앞에 쪼그리고 앉아 그림처럼 아름다운 저녁노을을 올려다봤다. 일요일 저녁이면 나는 어김없이 알 수 없는 불안과 긴장감이 들곤 했다.  일본 소설 ‘ 잠깐만 회사 좀 관두고 올게 ’에서는 이런 현상을 ‘사자에 증후군’이라고 했다. 일요일 저녁 시간에 방영하는 이 국민만화가 끝나는 시간인 8시면, 자동으로 새로운 한 주의 출근 걱정이 자연스레 시작되기 때문이란다. 도쿄에 온 후 출근의 걱정이 사라진 나는 일요일의 저녁을 노을을 안주삼아 캔맥주를 마시며 즐기고 있다. 갑자기 지금쯤 출근의 공포에 떨고 있을 서울의 회사 동기들에게 전화를 걸어 실컷 놀려먹고 싶은 마음에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러다 나도 모르게 피식하고 웃음 터트리고 오늘 찍은 사진을 뒤적인다. 각자의 꽁치 구이를 한 손에 들고 한 손에는 맥주잔을 든 이모와 내 사진을 한참 내려다본다. 올가을은 나에게도 이모에게도 가을처럼 흘러가길 기대하며...

<아네고 에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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