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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ego emi Sep 12. 2024

응원하고 싶었을 뿐

그가 나에게 제시한 주제는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상당히 도발적이었다. 흔히 볼 수 없었던 제법 어려운 한문이었는데, 내가 펼친 쪽지를 슬쩍 곁눈질로 보던 여사장이 그를 보며 말했다. “ 어머나, 이런 강렬한 주제를… 색을 빛내고 마음을 훔친다? 이런 의미인가?   ”그는 양쪽 어깨를 가볍게 끌어올리며 빙긋 웃었다.  그 순간 나는 에로틱, 오타쿠, 히키코모리등과 같은 일본 하면 떠오르는 1차원적인 단어들을 떠올리며,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를 슬쩍 한번 쳐다본 후, 열심히 최선을 다해 그려보겠노라고 말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덴샤 안에서 그가 건네준 쪽지를 다시 펼쳐보며, 무엇을 그려야 할지를 떠올려봤지만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았다. 


덴샤에서 노을이 지는 초저녁의 하늘을 올려다보면 나도 모르게 샛길로 새고 싶어 진다. 목적지는 없지만 이 골목 저 골목을 기웃거리며 웃고 떠드는 사람들을 훔쳐보고 싶어 진다. 오늘 같이 기분이 좋은 날에는 용기를 내 한 번쯤 가고 싶었던 그 가게로 직진해, 여느 일본의 직장인들처럼 “ 일단은, 생맥주 한잔 주세요!”라고  큰소리로 외치며 호기롭게 카운터 자리에 앉아, 차가운 맥주를 마시고 정성껏 구워주는 닭꼬치 구이를 우적우적 씹으며 스스로를 자축하고, 서울에 두고 온 지인들에게 문자를 보낼지도 모르겠다.  결국, 나는 갈아타야 할 덴샤를 타지 않고 집까지 걷기도 마음을 먹는다.  허기진 배를 역전 소바 가게에서 네모난 유부가 토핑으로 올려진 소바 한 그릇으로 채우고, 그날따라 유난히 크고 환한 보름달이 비춰주는 길을 따라 집으로 간다.  조금은 쓸쓸한 그 길에서 나는 그려야 할 그림을 떠올려 본다.  깜깜한 밤하늘 같은 머릿속에서 저 하늘의 보름달을 찾으려 애써 본다.  그러자 순간, 보름달에 갇힌 토끼 귀를 가진 소녀가 반짝하고 떠올랐다. 가던 걸음을 멈추고 하늘의 보름달을 올려다보자 그 이미지는 더욱 선명해지고, 토끼 귀를 가진 소녀의 왕방울 만한 눈과 내 눈이 마주친다.  나는 입가에 확신에 찬 미소를 머금고 혼잣말을 한다. “ 그래, 저걸 그려보자.”


다음 날 나는 수업이 끝난 후 롯폰기의 츠타야 서점으로 향했다. 이곳은 1층에 스타벅스 커피와 책을 볼 수 있는 테이블이 있고, 1층과 2층을 자유롭게 오가며 서가 있는 책들을 마음껏 가져다가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유명 디자이너의 아카이브부터, 일러스트 모음집, 사진첩등 디자인과 그림을 그리는데 영감을 주는 다양한 책들이 넘쳐났다. 나는 커피와 도넛을 주문하고 골라온 책들을 뒤적이며 도움이 될 이미지들을 스케치하거나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어둔다. 토끼 귀의 소녀는 어떤 포즈를 취해야 할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무슨 옷을 입힐까? 차근차근 어렴풋이 떠오르는 이미지를 구체화시켜 본다. 보름달에 갇혀 있지만 그 달빛 덕분에 더욱 눈부신 소녀, 탈출을 위해 몸부림치지만 다람쥐 통 같은 보름달 덕분에 그 몸부림이 더욱 도발적인 소녀…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스케치에 조금씩 자신감이 붙기 시작했다. 


나는 2주간의 작업을 끝내고 약속한 날짜에 흰 종이에 곱게 싼 그림을 들고 갤러리로 갔다.  호기심 많은 여사장은 내가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그림을 보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나는 그녀에게 그림을 내밀었고 그녀는 조심조심 그림을 싸고 있는 종이를 뜯어낸 후, 그림을 보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호들갑을 떨었다. “ 어머나, 너무 멋진 그림이네요. 주제와 딱 맞는 그림을 훌륭하게 그려냈어요. 그도 만족할 거예요.”그녀와 나는 그녀가 준비해 놓은 녹차를 마시며 그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그가 갤러리로 들어왔고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의기양양하게 나를 대신해 그림을 그에게 내보였다. 그는 처음 만난 날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빤히 그림을 내려다봤다. 그러다가 벽 쪽으로 놓인 테이블 위에 그림을 올려다 놓은 후 약간의 거리를 두고 또 빤히 쳐다봤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와 갤러리 사장을 보며 특유의 알듯 말듯한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눈치 빠른 여사장은 그의 마음을 알았다는 듯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 내주신 주제를 멋진 아이디어로 그려냈네요. 제가 다 욕심나는 그림이에요. 그림 값이 너무 싸서 작가님에게 미안할 지경이네요” 그러자 그는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 네네… 저는 마음에 꼭 듭니다. 작가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기대 이상입니다. 사장님 말씀처럼 그림 값은 제가 조금 더 올려드리겠습니다.  부족하지만 제가 드린 그림 값이 작가님의 작품 활동에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는 마냥 눈을 껌뻑이며 감사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그는 그림을 다시 종이로 싼 후 가지고 온 큰 쇼핑백에 조심스럽게 넣었다.  우리는 근처 라면 가게에서 한껏 기분이 좋아진 여사장님이 쏘는 라면을 함께 먹으며 잠시 이야기를 나눈 후 헤어졌다. 솔직히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그때 내가 그린 그림은 그렇게 대단한 작품이 아니었다. 발상은 나쁘지 않았으나 표현은 서툴렀고, 여지없이 나의 그림 실력이 한계가 드러나는 작품이었다. 그 후 어쩌다 가끔 내가 그림을 떠나보내기 전에 갤러리에서 찍어놓은 몇 장의 사진을 꺼내 보면 나도 모르게 얼굴이 화근 거렸다. ‘이걸 그 돈에 사주다니… 그는 단지 나를 응원하고 싶었던 것인 틀림없어. 그런데 그 그림 아직도 가지고 있기나 할까?’ 하는 의문이 들곤 했다.

<아네고에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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