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얼한 매운 낙지 비빔밥
대학 4학년 학기초에 교생실습을 다녀온 후 나는 인턴 모집 공고를 낸 회사에 부지런히 원서를 냈다. 교직을 포기한 나는 마음이 급해졌다. 이제부터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고 결심은 했으나 그것이 무엇인지 전혀 감을 잡을 수도 없었고 또 무엇을 하고 싶은지도 솔직히 몰랐다. 누가 뭐라는 것도 아닌데 불안한 마음에 날마다 잠을 설치고 아무리 피곤해도 아침 일찍 눈이 번쩍하고 떠졌다.
그날은 아침 일찍부터 인턴 면접이 있는 날이었다. 집에서 전철로 한 시간 이상을 가야 하기에 새벽부터 일어나 서둘러 준비를 하고 집을 나왔다. 오전과 오후 두 번의 면접이 예정되어 있었다. 나름 잘 나가는 두 회사는 필기시험을 맨 뒤로 돌리고 두 시간이 넘는 그룹 면접과 짧은 워크숍 과제를 해결하는 새로운 채용방식을 도입했다.약속된 면접시간보다 일찍 도착한 나는 쓰린 속을 달달한 자판기 커피 한잔으로 달래며 순서를 기다렸다.
열명이 한조가 된 우리에게 다양한 직급의 심사위원들이 한 권의 책처럼 두꺼웠던 입사지원서를 뒤적이며 질문을 던졌다. 나는 내가 무슨 답을 하고 있는지도, 그 답 속에 진정성이라는 것이 몇 퍼센트쯤 있기는 하는지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닥치는 대로 주절대기 바빴다. 길었던 면접이 끝나고 회사에서 주는 소위 면접비가 담긴 흰 봉투를 받아 들고 탕비실에서 수다를 떠는 직원들의 얼굴을 훔쳐봤다. 순간, 그들이 부러웠던 것 같다. 아니 그저 진로의 행보가 이미 정해진 그들의 처지가 부러웠다.
회사를 나와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던 나는 전철역에 도착해 시계를 봤다. 오후 면접까지 3시간이 남았다. 그 회사 근처에 가 점심을 먹을 생각으로 전철을 기다렸다. 문뜩 옆을 보니 배가 불룩 나온 줄무늬 넥타이를 맨 아저씨가 연신 손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인상을 쓰고 있었고, 내 뒤에는 남색 정장 차림의 30대로 보이는 여자가 무표정하게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들은 용쾌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아낸 걸까? 그래서 지금 잘해나가고 있는 중일까? 묘한 감정이 교차하는 순간 열차의 도착을 알리는 신호음이 들리고 저 멀리 희미하게 열차의 불빛이 보였다. 나도 모르게 점점 가깝게 다가오는 열차 소리를 들으며 지긋이 눈을 감았다. 이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복잡한 내 머릿속이 말끔히 지워지 길 바랬는지도 몰랐다. 열차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쏟아지고 나는 뒷사람에 밀려 앞으로 발을 내딛자 내 몸이 쑥 하고 어디론가 빨려 들어갔다. 그 순간 나의 두 팔을 양쪽에서 누군가의 손들이 꽉 붙잡았다. 내 뒤에 서있던 30대의 여인과 배불뚝이 아저씨였다. 정신줄을 놓은 나는 바보처럼 열차와 플랫폼 사이의 빈틈으로 발을 내디뎠고 그 속으로 빠지기 직전에 그들이 나를 건져 낸 거였다.‘젊은 아가씨가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지’라고 꾸짖는 듯 미간을 한껏 더 찌푸린 아저씨의 얼굴이 내 옆을 지나갔고, 미끄러져 벗겨진 구두 한쪽을 주워 주며 무표정 한 그녀가 전철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전철을 떠나보내고 나는 잠시 의자에 앉아 깜짝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깊은 쉼 호흡을 했다.‘그래… 정신을 차려야 한다. 벌써 약해지거나 지쳐서도 안된다.’ 다음 전철을 타고 두 번째 면접 장소에 도착한 나는 무엇보다 허기진 배를 채워야 할 것 같았다. 직장인들로 넘치는 한 식당으로 들어간 나는 정신이 번쩍 날 만큼 얼얼하게 매운 낙지 비빔밥을 주문했다. 지글지글 끓는 돌솥에 하얀 밥과 각종 나물이 놓이고 그 위에 시뻘건 낙지볶음이 더해졌다. 굵직한 낙지를 밥과 함께 쓱쓱 비벼 한 숟가락 크게 떠서 먹고 차가운 콩나물 국을 마셨다. 나는 허리를 곳곳이 세우고 똑바른 자세로 정신을 가다듬으며 씩씩하게 밥알을 씹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힘을 내라고 수없이 주문을 걸었다. 식당을 나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오늘따라 봄날의 하늘은 더 눈이 부셨다. 나는 두 주먹을 꼭 쥐었다.
오후의 면접은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마케팅 관련 미션을 주고 다양한 그룹토론을 거처 그것을 풀어낸 짧은 프레젠테이션을 했는데 나는 심사위원들의 기립박수를 얻어냈다. 그 후 나는 처음으로 내가 광고에 관심과 소질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여름방학 내내 한우물을 판 덕에 결국 광고회사에 입사하게 되었다. 그때의 시간이 없었다면 지금의 내 선택은 없었을지도 몰랐다. 혼미한 정신이 번쩍 날 만큼 얼얼하게 매웠던 면접 날의 낙지 비빔밥 – 나의 새로운 길을 향한 첫발을 내딛을 힘이 되어줄 걸 알았다면 조금 더 맛있게 먹을 걸 그랬다.
아네고 에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