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보는 방법

by anego emi

어느덧 여름 방학이 끝나고 가을이 깊어간다. 우리 모두는 본격적인 졸업 작품 작업에 들어갔다. 수업 시간의 대부분은 졸업 작품 준비에 할애되었고, 원하면 언제든지 담당 선생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일러스트 중에서도 패션 일러스트를 전공으로 선택한 나는, 그 덕분에 내 그림에 날개를 달아줄 멋진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다. 선생님은 패션 일러스트는 물론이고 인물 일러스트 분야에서 베테랑으로 활약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만화나 일반 일러스트를 전공으로 선택한 터라, 나는 선생님과 전공수업 때면 매번 일대일 과외수업을 받을 수 있었다. 선생님은 다정하게 마주 앉아 세심하게 개선할 포인트를 지적해 주고, 내 그림에서 장점을 찾아내 아낌없이 칭찬을 해주었다. 선생님은 늘 내가 그린 그림을 보며 색감이 탁월하다는 코멘트를 해주었는데 그때마다 그 칭찬 앞에 머쓱해하는 나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색은 어쩌면 김 상이 세상을 보고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의 하나인지도 몰라요. 작곡가가 음표로 그렇게 하듯이 말이죠. 말하자면 김 상의 색들은 그런 것들을 잘 전달하고 있어요. 나는 김 상이 표현하는 그 방법이 아주 마음에 들고요.” 선생님의 이런 조언은 나에게 그림 그리는 재미와 자신감을 더해주었다. 늘 스케치에 자신이 없어 마음에 드는 풍경을 보면 사진 찍기에 급급했으나, 이제는 그러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 사진보다 눈에 담고 마음에 담으려 애를 썼다. 나를 멈춰 서게 했던 그 장면이 뿜어내는 색과 느낌에 집중했다. 내가 그리려고 하는 것은 똑같은 장면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스토리가 아니었던가. 어떤 장면은 꽉 채운 하늘만으로도 충분히 그 역할을 다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나는 졸업 작품으로 도쿄에서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한 권의 일러스트 에세이 집에 담기로 했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한국으로 돌아가 꼭 책으로 내고 싶다는 희망을 품었다. 나는 그동안 내가 모았던 풍경 사진들을 계절 별로 나누고, 그 안에서 풍경과 인물을 나누고, 적당한 스토리를 상상해 보기로 했다. 화자는 물론 내가 될 터이니 나에 관한 스토리에서 타자로 혹은 도쿄로 이어져도 좋았다. 나는 연필로 꼼꼼히 스케치를 하고, 그것을 라이트 박스 위에 올려놓고 0.3mm 얇은 유니펜으로 그림을 그렸다. 나의 장점인 섬세하고 부드러운 선으로 머리카락, 나뭇잎, 꽃잎 등은 물론이고 사물의 상태와 인물의 감정을 직감할 수 있도록 세심하게 스케치를 했다. 처음에는 한 장을 완성하는데 일주일이 걸렸으나 점차 속도가 붙으면서 3일이면 한 장이 완성되었다. 책이 되려면 적어도 100장 이상은 그려야 했다. 게다가 책으로 제본을 해야 하니 그 시간까지 감안하면 더 부지런히 속도를 내야 했다. 매일 손목이 뻐근해지도록 가는 펜 선을 그으며 날이 밝았다.


매주 작업한 것을 담당 선생님에게 보여주며 진행 상황을 점검받는다. 선생님은 나에게 이제부터 슬슬 컬러 작업을 더해보자고 했다. 선에 따라 색을 칠하기보다 선과 색을 분리해서, 어울릴만한 컬러들을 조합해서 배경을 따로 작업하자고 했다. 이 방법은 늘 팬으로만 그림을 그리는 나에게 선생님이 먼저 제안을 해주었던 것인데, 그 덕분에 나의 색감이 빛을 발하던 순간이었다. 각 계절 별로 어울리는 색들을 고르고 수채화, 아크릴, 색연필, 크레용등 다양한 재료를 사용해서 표현하기로 했다. 선생님과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흥미로워졌고, 나는 그럴 때마다 하굣길에 신주쿠의 화방으로 가서 재료 고르기에 신이 났다. 고민하고 또 고민해서 물감을 고르고, 한 번도 써본 적 없지만 욕심이 나는 비싼 컬러 잉크도 몇 병 샀다. 뿐만 아니라 다리가 저려 오도록 새로 나온 컬러의 크레용과 색연필, 파스텔 등을 테스트했다. 그리고 달뜬 마음으로 좁고 작은 내 작업실로 걸음을 옮겼다. 막연하지만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과 함께...

<아네고 에미>

이전 09화그림을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