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끔 뒤돌아 본다. 회사를 떠나온 나를. 도쿄행을 결심한 날의 나를. 그리고 한 번도 꿈꾸지 않았던 이곳에서 낯선 이들과 그림을 그리는 나를. 내가 좋아하는 일본 카피 중에 이런 것이 있다. “ 뒤돌아 보지 않는다. 뒤에는 꿈이 없으니까.” 그런데 나는 지금 내 꿈을 위해 뒤돌아 보고 있다. 후회는 실패의 다른 이름이 아님으로 가끔씩 찾아오는 후회는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 것이라는 믿음으로. 결국 선택은 내 몫이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대학 시절 늘 행동이 앞서는 내게 친구는 말했다. “ 넌 참 놀라워. 나는 생각 중인 걸 고단새 넌 그걸 하고 있단 말이야.” 그때마다 나는 제법 스스로가 자랑스러운 듯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답하곤 했다 “ 생각, 그거 오래 하면 뭐 하냐? 머릿속에 떠 올랐다면 일단 해보는 거지 뭐.” 이런 즉흥적인 행보는 대학을 졸업하고 광고회사로의 입사로, 그리고 수차례 선배들을 따라 별생각 없이 회사를 옮겨 다녔고 , 어느 날 때가 되었다는 듯이 퇴사를 했다. 그리고 다시 학생이 되어 뭘 그리고 싶은지도 모르면서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그 생각 하나만으로 이곳에 오는 무모함으로 이어졌다. 딱히 큰 후회는 없지만 이전과 달리 아끼던 것을 우연히 잃어버린 날의 허전함과 아쉬움을, 가슴 한 구석에 안고 살아간다. 이 마음을 털어내고 싶은 마음으로 나는 이곳을 본다. 그래서인지 유난히 풍경보다는 사람들이 보인다. 아침의 등교 길에, 저녁의 하교 길에, 내가 하던 일을 반복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달리는 덴샤에서, 흐릿한 조명의 카페에서, 북적이는 시장 거리에서, 나는 사람들을 훔쳐보며 머릿속에서 그림을 그린다. 그림에 서툰 나는 그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마음을 상상해 본다. 낙서에 가까운 스케치 옆에 내가 그가 되어 그의 속마음을 내 멋대로 써내려 간다. 나는 이것들을 모아 책을 만들고 졸업 작품으로 제출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틈 날 때마다 걷고 그리고 생각하고 걷고 그리고 생각해야 한다. 세상에 쉬운 일은 없지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어려운 일, 고생을 사서 하는 일을 기꺼이 찾아내는, 나 자신에게 또 놀란다.
주말이면 서둘러 집을 나와 역전에 있는 작은 빵집에 간다. 도쿄 사람들은 참으로 빵을 사랑해서 어디를 가든 꼭 그곳에서 가장 사랑을 받는 동네 빵집이 있다. 우리 동네에서 제법 오랜 업력을 자랑하는 이 빵집은 갓 구운 빵과 커피를 세트로 한 아침 메뉴가 인기다. 하루 두 번 빵을 굽기에 금새 빵이 동나기도 하고, 오전 10시면 아침 메뉴가 끝나는 지라, 주말이라고 마냥 늦장을 부리면 먹을 수가 없다. 나는 아직도 온기를 품은 단팥빵과 모닝빵을 고르고, 아르바이트생이 내려준 커피 한 잔을 받아 들고, 햇살이 잘 드는 창가 쪽에 자리를 잡는다. 양손으로 커피잔을 모아 쥐고 커피 향을 맡는 나에게 옆자리의 할머니가 혼잣말을 하듯 다정히 말을 건넨다. “살아 있다는 것은 좋은 거예요. 커피도, 빵도, 맛볼 수 있고… 게다가 아침 햇살이 너무 좋잖아요 ” 할머니는 창밖 풍경에 눈을 고정 한 채, 천천히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빵을 포크로 잘라 입 속으로 넣고 음미하듯 천천히 씹는다. 나는 할머니와 간간히 눈을 마주치며 커피를 마시고 빵을 먹었다. 그 순간 나는, 우리의 무해한 이런 모습이 무심코 창밖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에 아침의 햇살처럼 빛이 나서, 아침이란 저런 풍경이었지 하고 생각해 주기를 바란다. 물론, 이 풍경은 내 작품 속 한 장면이 된다.
그림은 글을 쓰는 것처럼 그려야 한다는 말이 있다. 글에서 단어 하나하나가 의미가 있듯 그림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이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지 않을까? 등장 인물도 풍경도 바람도 햇살도… 한 편의 스토리를 연상할 수 있는 도구로 그 역할을 다해야 한다. 그래서 그림이 이토록 어려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잘 쓰인 소설책이나 수필집을 읽으면, 매 페이지마다 한 장의 그림이 떠오르듯이 잘 그린 그림은 이야기가 떠 오르고 감정이 떠 올라야 하는 것이다. 오늘 내가 느낀 이런 아침의 평온함이 내가 그린 그림 속에 묻어나기를 바라며 나는 할머니의 표정을 수없이 훔쳐본다. < 아네고 에미 >
PS : 개인적인 사정으로 2주간 연재를 하지 못한 점 사과드립니다. 언제나 부족한 제 글을 읽어주시는 구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늦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