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를 고르는 즐거움. 이 또한 그림을 그리는 큰 즐거움 중에 하나다. 내가 다니는 학교 근처에는 도쿄에서 가장 유명한 종이 전문점이 있다. 웬만한 화방보다 큰 규모에 1층과 2층에 다양한 종이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에 들어서면 무심한 듯 하지만 언제나 도움에 응할 준비가 되어있는 종이 마스터들이 있다. 자신의 작품에 어울리는 종이를 찾는 것에 어려움을 느낀다면 부담 없이 도움을 청하면 된다. 먼저 작업의 도구와 표현하고 싶은 포인트가 무엇인지를 설명한다. 평소의 과제는 가지고 있는 종이를 활용하거나 근처 화방에서 종이를 사곤 했는데, 졸업 작품은 보다 신중해야 한다고 선생님이 신신당부를 하셨다. 종이에 따라 완성도의 차이가 굉장하다고 했다. 선생님의 충고에 따라 나는 종이 마스터와 상의를 하고 그분이 골라주는 종이들 중에 몇 개의 샘플을 골랐다. 이 종이 전문점에서는 샘플로 얻어가는 종이는 무조건 공짜다. 나는 욕심나는 종이들을 마음껏 테스트해 볼 수 있음에 신이 났다. 이곳은 종이 전문점답게 컬러칩 같은 종이 샘플집을 원하면 얼마든지 공짜로 가져갈 수 있다. 학생들에게 결코 야박하지 않은 이곳에 오면 두둑하게 공짜로 종이를 얻어가는 것은 물론이고, 욕심나는 종이 구경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엽서 크기만 한 다양한 샘플 종이 위에 그림을 그리고 채색을 해보기도 한다. 센스 있는 학생들은 이걸로 작품집을 만들고 심지어 축제 때 판매를 하기도 한다.
선생님과 완성된 작품을 샘플 종이에 출력을 해보고 장단점을 분석했다. 역시 선생님의 말씀처럼 종이에 따라 그 느낌차이가 달랐다. 우리는 별 의견차이 없이 적당한 종이를 고르고 나는 통 크게 백장을 주문했다. 충분히 테스트해보고 싶었고 이곳에는 학생들의 졸업작품 시즌에는 20% 특별 할인을 해준다. 이제 남은 것은 부지런히 그림 작업을 마무리하고 에세이를 쓰는 일이다. 그림에 담긴 이야기와 내 느낌을 간략하게 쓸 것이다. 책 속에 포함된 글 또한 작품으로 느껴질 수 있도록 손글씨 같은 서체를 고르고 아기자기한 아이콘들을 중간중간에 포인트로 더하기로 했다. 선생님은 척척 진도가 나가는 것이 감이 좋다며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갑자기 덥석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 김상, 꼭 졸업작품전에서 수상하는 거야. 이대로라면 충분히 가능해!” 나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마지막 크로키 수업이다. 늘 그렇듯이 나는 아직도 못 그린다. 내가 봐도 어설프고 자신감이 부족한 선들이 한 시간 내내 스케치북 위에 그려졌다 지워졌다 한다. 그런 나를 깐깐한 크로키 담당 선생님이 쯧쯧쯧 소리를 내며 지켜본다. 나는 무던하게 계속 스케치를 이어간다. 조금이라도 내 실력이 나아지기를 바라는 선생님의 진심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모델이 마지막 포즈를 취한다. 나는 무슨 생각인지 과감하게 연필대신 미끄러짐이 좋은 오일 색연필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거침없이 손이 가는 대로 멈추지 않고 그렸다. 머리카락과 그림자는 손가락으로 북북 소리르 내어가며 문질러 표현했다. 번짐이 심한 색연필이라 선의 굵기가 일정하지 않았지만 보기 나쁘지 않았다. 나는 이것을 오늘의 과제로 내기로 결심한다. 드디어 선생님의 심사평이 시작되었다. 각자의 이젤 위에 올려놓은 과제를 보고 선생님은 그 자리에서 바로 점수를 매긴다. 한 번도 A를 받아본 적이 없는 나는 아무렴 어떠냐는 마음으로 선생님의 평가를 기다린다. 그런데 오늘따라 이상하게 선생님이 내 그림을 빤히 들여다보다가 내 얼굴을 힐끗 본다. 내가 당황한 듯 눈을 동그랗게 뜨자 선생님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갑자기 큰 목소리로 말했다. “ 자, 모두들 김상 주위로 모여봐요.”
선생님은 트레이드 마크인 긴 나무 막대로 내 그림을 가르치며 말했다. “ 잘 그릴 수 있지만 이렇게 그릴 수는 없지. 그동안 애쓴 노력이 이제 빛을 발하는 거야. 오늘 이만큼 성장한 김상에게 박수를 쳐줘야 하지 않을까?” 순간 모두 웃음이 터져 나왔고 연이어 박수 소리가 이어졌다. 나는 어쩔 줄 몰라하며 멍한 표정을 짓는다. 선생님은 그런 나를 보며 빙긋 미소를 짓고, 내 그림 위에 빨간색 플러스 펜으로 A라고 힘차게 휘갈겨 쓴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돈다. 옆자리의 중국에서 온 그림천재가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 오네상 멋져. 나도 이렇게는 못 그려.” 오늘따라 무슨 일일까? 연이어 선생님들의 응원이 이어진다. 정말 졸업작품전에서 수상이라도 꼭 해야 하는 건 아닐까. 이 응원들에 보답하려면 말이다. 집으로 가는 길에 대모님의 가게에 들러야겠다. 처음 100점을 받은 아이처럼 대모님에게 자랑을 하고 대모님이 따라 주는 차가운 맥주 한잔을 마시고 싶어졌다. 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조용히 외쳐본다 '파이팅!'
< 아네고 에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