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일을 내고 말았다. 몇 일밤을 새워 그림 작업을 끝내고 책상 위에서 까무룩 잠이 들었다. 잠결에 쿡쿡 쑤셔오는 오른쪽 어깨를 아래위로 들썩이다가 무심코 오른쪽 팔을 책상 위에 내던지듯 폈다. 그 순간 손끝에 차고 단단한 것이 느껴지며 탁 하는 짧지만 단단한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나도 모르게 눈이 번쩍 하고 떠졌다. 그날따라 고생한 나를 위로한답시고 마시던 와인 한잔이 떠올랐다. 그 와인 잔이 펼쳐놓은 맥북 위로 넘어진 것이라면, 빨갛고 진득한 액체가 키 보드 사이로 스며들어 노트북은 먹통이 될 것이 분명했다. 단박에 쏟아지던 잠을 앗아갈 만큼 불길했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그저 내가 몇 모금이면 금세 해치울 와인 잔속의 남은 와인은 이 엄청난 일을 해 내기에 충분한 양이었다. 급히 욕실로 달려가 마른 수건으로 붉게 얼룩진 키보드를 조심스레 닦고 시계를 봤다. 새벽 5시. 조금 있으면 첫 차가 지나갈 시간이다. 맥북을 끄고 언제나 결정적인 순간에 결정적인 사고를 치는 나에게 그럴 수도 있다고 애써 다독인다. 일단 애플 스토아에 가서 수리를 맡겨보자. 지금이야말로 졸업 작품을 위해 맥북은 꼭 필요한 순간이지 않은가. 그림 작업도 스캔 작업도 모두 끝냈고 글도 대충 써놓았으니 이제는 맥북으로 편집을 해야 할 때다. 잠시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기도를 했다. 제발 맥북이 멀쩡이 살아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랐다.
맥북은 가망성이 없어 보였다. 친철한 미소를 장착하고 타고난 듯한 애플스토아의 직원은 최선을 다해 보겠지만 큰 기대는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일단 맥북의 상태를 파악하고 수리가 가능한지 엔지니어랑 상의를 하고 견적이 나오면 전화로 알려주겠다고 했다. 막막했다. 이제 작업은 어떻게 한단 말인가? 축 처진 어깨로 졸업 작품 작업을 위해 개방된 교실로 들어서자, 1학년 때 일러스트 실습을 담당했던 현업 작가이기도 한 L 선생님이 반갑게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알은체를 했다. 내가 힘없이 바람 빠진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목례를 하자 선생님은 나에게 다가와 특유의 장난기 넘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 김상, 작품 잘되어 가지요? 담당 선생님이 자랑이 아주 대단해요. 꼭 상을 받길 바랄게요. 언제든지 내 도움이나 조언이 필요하면 대환영이에요!” 듣는 순간 없는 힘도 생겨나야 할 그 말의 끝에 나도 모르게 작고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선생님은 그런 나를 힐끔 곁눈질하며 다시 물었다. “ 허허… 늘 씩씩한 김상이 무슨 일이 있는 거 같은데… 뭔가 걱정거리라도 있나요?”나는 가볍게 웃음을 머금고 선생님에게 작품을 마무리해야 하는데 맥북이 어이없는 나의 실수로 먹통이 되었음을 고회성사 하듯이 담담하게 털어놓았다. 그러자 선생님은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매고 있던 배낭을 책상 위에 내려놓고, 그 안에서 자신의 최신형 맥북을 꺼냈다. 그리고 말했다. “ 이거 빌려줄게요. 졸업 작품 마무리 할 때까지 실컷 쓰고 돌려줘요. 단 조심히 써주면 감사하고요. 자 이제 걱정거리 완전 해결이니 다시 씩씩한 김상 모드로 체인지 ~”선생님은 맥북을 나에게 건네주면서 나와 가볍게 하이파이브를 했다. 선생님의 맥북은 나의 맥북보다 훨씬 빨랐고 소프트 웨어들도 다 최신형이었다. 결과적으로 작업은 더 순풍에 돛을 달게 된 것이다. 누가 그랬던가? 뭔가 마음에 들지 않고 좌절할 때 비로소 열리는 것이 희망이라고. 뜻하지 않게 우연히 만난 선생님이 나에게 이렇게 빠르게 해결책을 제시해 줄 줄이야. 나는 가방 속에 작품을 스캔해 둔 외장 하드를 꺼내고 포토샵 작업에 들어갔다. 때 마침 교실로 들어온 대만 유학생 H가 내 옆자리에 앉아 자신의 맥북을 펼친다. 이 친구로 말하자면 나의 맥북 과외 선생님이다. 대만에서 디자이너로 활동하던 그는 우리 반에서 나 다음으로 나이가 많다. 그래서인지 언제나 나를 살갑게 누나라도 부르며 많은 것을 도와준다. 절망으로 서서히 밝아오던 오늘 아침, 나의 기도를 들은 그분께서 줄줄이 나를 도와줄 천사들을 보내주는 걸까? 그는 내 어깨를 가볍게 툭 치며 속삭이듯 말했다. “ 누나, 하다가 어려운 것 있음 언제든지 말해요. 나 오늘 여기서 쭉 작업할 거니까.” 나는 걱정이란 것은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해맑게 웃으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네고에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