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니, 프린터 하러 가자 ”시계를 보니 새벽 3시다. 이 시각에 그녀와 내가 프린터를 하러 가는 곳은 신주쿠에 있는 킹코스다. 킹코스는 24시간 운영되고 제법 크고 널찍한 작업용 테이블이 있고 자와 칼까지 구비되어 있다. 학교에서 미처 다 끝내지 못한 작업물들을 이곳에 와서 인쇄를 하고 절취선에 따라 재단을 한다. 나는 신주쿠에서 가까운 곳에 사는 한국 유학생 J의 집에서 졸업 작품집의 마무리 작업을 하고, 제법 차가운 새벽바람을 맞으며 그녀와 킹코스로 향했다. 졸업 작품 제출까지 남은 시간은 15시간, 프린터 한 것을 챙겨 첫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 남은 제본 작업을 한 후, 학교로 가서 제출을 하면 이 길고도 험난 했던 여정이 끝이 난다. 며칠 전 이미 테스트용으로 제본을 해본 지라 제본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다. 단지 침착하게 한 장 한 장 3M 스프레이 풀을 뿌리고 차곡차곡 종이더미를 쌓아 올리듯 붙여가면 그만이다. 투명한 트레싱지에 책 커버로 쓸 표지 일러스트를 인쇄하니 제법 근사했다.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짓고 부지런히 종이를 자르고 한 장 한 장 구겨지지 않도록 종이를 보관하는 플라스틱 가방에 담는다. 첫차 시간이 가까워오자 우리는 편의점에서 에너지 드링크를 한 병씩 사서 마시고 서로의 눈을 마주치며 파이팅 하고 외친다. 밤새 비워두었던 방에는 한기가 돌았다. 나는 갑자기 쏟아질지도 모르는 졸음을 대비해 히터 대신에 작은 손난로를 켜고 차가운 물 한잔을 단숨에 비운다. 그리고 책상 위를 깔끔하게 정리하고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제본을 위한 준비를 한다. 실수는 없어야 한다. 이제는 시간이 없다. 나는 경건한 의식을 치르듯이 잠시 눈을 감고 기도를 했다. 오늘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한없이 가볍기를. 고생한 나를 기꺼이 토닥여 줄 수 있기를.
제본 작업은 순조로웠고 오후 4시가 조금 넘어서 작업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급히 샤워를 하고 옷을 챙겨 입고 학교로 향했다. 막 작품 제출을 끝내고 나오는 친구들과 서로 인사를 하고 홀가분한 그들의 얼굴을 보며 잠시 후의 내 얼굴을 떠올려본다. 이력서처럼 내 이름 옆에 증명사진을 붙인 작품 설명서와 투명한 비닐에 돌돌 싸 온 작품집을 조교에서 제출했다. 그녀가 환하게 웃는다. 한쪽 눈을 찡긋하며 기대된다 는 표정을 짓는다. 나는 그녀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 교실 밖을 나왔다. 마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지라 제출을 위해 학생들이 몰려들기 시작한다. J가 가슴에 무언가를 꼭 안고 계단을 허겁지겁 뛰어올라 온다. 나는 그녀를 반갑게 맞으며 아직 시간이 충분하니 괜찮다고 그녀를 진정시키고 일층 휴게실에서 기다리겠다고 말한다. 그녀를 기다리면 커피 자판기에서 산 달콤한 카푸치노를 마신다. 밤새 한숨도 잠을 자지 못했지만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천직이라 믿었던 일을 떠나 마흔에 다시 학생이 되었고 이제 졸업이라는 결승점이 코앞이다. 그 결승점을 통과한다고 크게 달라질 일도 누군가 나를 알아봐 주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멈추지 않고 이만큼 달려온 나를 내가 인정하면 그만이다. 대단한 일을 해 낸 것처럼 스스로가 자랑스러웠다. 앞으로 어쩌면 나에게 생길 일에 대한 막연한 기대를 품으며 남은 오늘을 보내고 싶었다.
오늘은 졸업 작품 결과 발표 날이다. 아울러 평가가 끝난 자신의 작품을 찾아가는 날이기도 한다. 만약 상을 받게 되면 작품은 그냥 두고 가면 된다. 그 작품은 학교가 마련한 전시 공간에서 일주일 동안 전시된다. 수상자들은 후배들의 졸업 작품 준비를 위해 자신의 제작 과정과 작품 의도 등을 설명하는 강연에 초청된다. 나는 담담한 마음으로 작품집을 제출했던 교실로 향했다. 나와 눈이 마주친 같은 클래스의 K가 나를 향해 빙긋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리고 교실 입구의 게시판에 붙은 발표자 명단을 가리킨다. 나는 순간 두근두근 심장소리가 커지는 것을 느끼며 게시판 앞으로 다가갔다. 나도 모르게 아하~하는 탄성이 제법 크게 새어 나왔다. 한자로 쓰인 10명의 이름들 속에 내 이름이 있었다. 장례상이었다. 교실로 들어서자 조교가 환하게 웃으며 나에게 다가와 축하한다고 말한다. 작품 심사를 맞은 선생님들도 작품집에 관한 칭찬의 말을 한마디씩 쏟아내며 환하게 웃는다. 어쩔 줄 몰라하는 나에게 데생을 담당하던 S선생님이 다가와 속삭이듯 말한다. “ 김상, 난 김상 작품집이 제일 좋았어. 장례상이지만 대상이라고 생각해도 좋아. 나는 그랬으니까.” 특유의 장난기 넘치는 미소를 머금고 수고했다는 듯이 내 어깨를 가볍게 툭 치고 선생님은 교실을 나갔다. 나는 선생님의 뒷모습을 향해 감사의 목례를 하고 조교가 내미는 단 10명의 수상자에게만 주어지는 전시와 강연 스케줄이 적힌 종이를 상장처럼 떨리는 두 손으로 받아 든다. 학교에서 나와 역으로 향하는 동안 간간히 마주친 아는 얼굴들이 축하인사를 건넨다. 나는 감사하다는 말을 대신해 환한 미소를 짓는다. 나는 역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려 흔들리고 약해질 때마다 나를 위로하던 오차 빛의 강물이 내려다 보이는 다리로 향한다. 지금쯤이면 서서히 일몰이 시작되고 노을이 아름답게 강물 위를 비출 시간이다. 오늘은 지는 노을을 한참 올려다보고 싶어졌다. 눈물이 날 것도 같다. 그 이유는 단지 내가 상을 받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엄마에게 전화를 하고 싶어졌다. 팀장으로 승진을 한 날처럼 엄마에게 자랑을 하고 싶어졌다. 4년간 이곳 도쿄에서의 날들이 나를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게 할까. 한국으로 돌아가면 내가 떠난 그 자리를 잘 버틴 내 동기들은 어쩌면 본부장이나 임원이 되어있을 것이며, 후배들은 내 자리를 대신하고 나보다 더 유능하게 일을 해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치열했던 그 시간들을 말끔히 지우고 다시 새로운 출발점이다. 아직 목적지도 정하지 못했다. 단지 그냥 앞으로 앞으로 달려야만 하는 외롭고 고독한 마라토너가 되어 남은 생을 살아갈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작가로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희망을 겁도 없이 품어본다. 그 가능성을 졸업 작품으로 조금이 나며 확인받은 것이라고 믿으면서 말이다.
PS : 그동안 마흔 살의 유학기를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부디 부족한 제 글이 나이를 떠나 자신의 인생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고 싶은 분들께, 조금이나마 시작할 수 있는 용기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해 봅니다. 저는 아직도 작가로 살아가고 싶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살아갑니다. 올 해는 꼭 세상에 선보일 만한 한 권의 책을 쓰고 그릴 수 있기를 날마다 다짐합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며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하면서요. 다음 주부터 새로운 연재를 시작해 볼까 합니다. 기쁘게 읽어주시고 응원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아네고 에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