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순간들

by anego emi

‘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 이모님은 그날 이후로 나타나지 않았고, 지금까지 일한 자신의 급여는 정산해서 카운터에 맡겨놓으면 챙겨가겠다고 했다. 굳이 얼굴 보고 서로에게 심한 말이 오가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이모님의 서슬 퍼런 행동에 이미 이런 결말을 예상을 했으나 왠지 모를 불길한 예감이 가슴 한구석에 맴돌았다. 이모님은 그날 가게를 나서기 전, 그동안 만들어 놓은 양념들을 모조리 처분했고, 지금까지 주방보조로 일했던 파키스탄 출신의 K에게 한 번도 그녀의 레시피를 알려주지 않았다. K가 그녀를 도와 요리를 하려고 해도 그녀는 재료를 다듬고 써는 일만을 허락했고, 양념장이나 소스를 만드는 것을 보거나 관여하는 것을 일절 금지했다. 가게에서 가장 인기가 있던 메뉴는 불닭 치킨이었는데, 닭을 한 입 크기의 일본식 가라아게 스타일로 튀긴 후에 그녀가 개발했다는 달짝지근하면서도 매콤한 뒷맛을 자랑하는 양념치킨 맛 소스로 버무려 냈다. 이 소스 덕분에 밥반찬으로 술안주로도 잘 어울렸다. 대모님이 여러 번 이 소스의 레시피에 관해 이모님에게 물었으나, 이모님은 때가 되면 다 알려드릴 터이니 기다라고 했다. 다른 요리들은 약간의 손맛 차이가 있다고 해도 가게마다 쓰는 조미료와 재료들이 대동소이했기에 맛의 차이가 크게 나지 않았다. 나는 딱 한번 이모님이 불닭 치킨의 소스를 만드는 것을 곁눈질로 본 적이 있다. 일주일에 딱 하루이고 곁으로 풍기는 이미지로 봐서는 절대 요리 같은 것에 관심이 없어 보인 탓인지, 이모님은 나를 그다지 경계하지 않았다. 닭강정 소스에 타바스코 소스, 후추, 그리고 캡사인신 같은 것을 넣었던 것 같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비율인데, 어쩌다 곁눈질로 본 것만으로 가름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주방 이모님의 갑작스러운 부재 소식을 들은 우리 이모는 출근 시간을 조금 미루고 대모님의 가게로 달려와주었다. 그리고 남은 재료를 체크하고, 부족한 것을 급하게 주문을 한 후, 이모는 어쩔 줄 몰라하는 대모님에게 차분하게 말했다. “ 마마, 이제부터라도 요리를 배워야 해요. 이 바닥에서는 마마가 직접 요리를 못하면 힘들어요. 이런 일은 앞으로 비일비재할 거예요.” 손에 물 한방을 묻힌 적 없을 것 같은 대모님은 단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K가 생각보다 한국 요리에 능숙했다. 파키스탄에서 한국 음식점에서 일을 오래 했고, 그 덕분에 한국 음식을 본격적으로 배우고 싶다는 결심을 했다고 했다. 어찌어찌하여 일본에 와서 한국 음식점에서 일을 하게 되었지만, 자신은 반드시 고국으로 돌아가서 자신의 이름을 건 한국 식당을 오픈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손도 눈치도 빨랐다. 그 덕분에 불닭 치킨을 제외한 대부분의 요리를 만들 줄 알았다. 일주일에 두 번 우리 이모의 부탁으로 다른 가게에서 일하는 성당 교우이신 이모님들이 가게로 와, 대모님과 K에게 요리를 가르쳐 주었다. 시식은 나와 큰 딸이 담당했는데 제법 이전 주방 이모님의 맛이 났고, 어떤 것은 자극적이지 않아 더 좋았다. 나는 이제부터 두 분이 요리를 해도 문제없을 것 같다고 용기를 북돋았고, 불닭 치킨 소스는 다른 가게들의 것들도 먹어보고 하면서 우리 만의 레시피를 만들자고 했다. 유튜브가 없던 시절이니 직접 다리품을 파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가게는 생각보다 별문제 없이 잘 돌아갔다. 게다가 대모님이 개발한 김치 치즈 전이 불닭 치킨의 공백을 메워주었고, 물만두가 예상외로 인기가 있었다. 부담 없이 저렴한 가격 덕분에 어떤 테이블 이든 기본으로 시키는 메뉴가 되었고, 가볍게 한잔하고 싶은 날 혼술의 1등 안주가 되었다. 그 덕분에 나는 더욱 부지런히 만두를 빚어야 했다. 이상하게도 요일마다 매번 오는 단골손님이 있는데 내가 일하는 수요일에 오는 손님들은 나를 '만두 빚는 오네상'으로 기억했다. 그런 그들을 내가 반갑게 알은체를 하면, 환하게 웃으며 물만두를 주문했고 음식을 내어오는 나에게 말했다. “ 오네상을 꼭 닮은 작품이네요 ”나는 가볍게 감사의 목례를 하고 미소를 짓으며 답했다. “ 부디 맛있게만 드셔주세요. 더 멋진 작품으로 보답하겠습니다”


언젠가, 나처럼 마흔을 갓 넘기고 일본으로 요리를 배우러 온 증권맨이 쓴 에세이를 읽은 적이 있다. 그 또한 자신의 일에서 번아웃을 느끼고, 자신이 즐겁고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일을 하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 잡혔고, 결국 그 일이 요리임을 깨닫게 되었다고 했다. 그는 모든 것을 팽개치고 교토에 있는 유명 요릿집 부엌에서 막내로 일을 시작했다. 그곳에서 가장 낮은 서열인 그는 모든 것을 다시 배워야 했다. 힘들고 고댔지만 인생에서 결코 놓치지 말고 살아가야 할 자세와 마음가짐을 배웠다고 했다. 결코 자신을 낮추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것들을 그는 그때 몸으로 부딪치면 배운 것이다. 그와 나는 처지와 목표가 다르지만, 나 또한 이곳에서 일을 하면 그가 느낀 비슷한 감정을 가슴에 품게 된 것 같다. 사람들을 대접하고 그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일에 대한 보람과 감사에 대한 것. 치열한 광고대행사에서 결코 느낄 수 없었던 그런 감정들이 참으로 벅찼다. 이런 것들을 배우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인지도 몰랐다. 이런 마음으로 세상을 보고 사람들을 대하는 감각을 가질 수 있다면 나의 글과 그림은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믿고 싶어지는 순간들. 그 순간들을 위해 ‘무의식의 나’가 이곳으로 나를 이끈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그때 나는 결심을 했다. 내 졸업 작품의 테마는 이것으로 하리라 하고. 그 순간들을 책으로 만드는 것. 작가로서 첫 발을 내 딛기 위해 마흔 살의 용기로 써내려 한 내 인생의 첫 책 될 것이라 확신했다.

<아네고 에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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